(무단전재) 머포드래곤 by 뷁커드빠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말을 왕왕 한다. 대개는 호사가들의 허풍이지만, 불행히도(그렇다, 불행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가끔은 그 말이 옳을 때도 있다. 예컨대 20년 전에 있었던 게이트 사태가 그렇다.

20년 전, 정권의 점진적 붕괴를 견디지 못하고 평양에서 일어난 북한의 정치적 급변 끝에 약간의 군사적 충돌과 고통스러운 유혈사태를 겪고 급속도로 대한민국이 통일된 직후 원산에 게이트가 출현했을 때, 사람들은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 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법(魔法)과 신통(神通)을 부리는 말 그대로 판타지 같은 세계와 갑자기 연결되어 버린 것이다. 그 충격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훗날의 역사가들이 비아냥을 담아 게이트 피버(Gate fever)라고 부르게 된 신경증이 세계적으로 다발하기도 했다. 게이트 너머의 세계의 공기가 유독하다고 믿어 방독면을 쓰고 다니거나, 게이트를 넘어왔을 미지의 세균과 바이러스를 광적으로 두려워한 나머지 외부와 차단된 폐쇄시설을 만든 다음 그 안에 틀어박혀 아사하는 사람도 나왔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고 할까. 종말론이 크게 유행하였고, 자살과 폭력 사태가 급증하였으며, 기독교의 제 종파들은 공의회를 열어 매우 미묘한 신학적 문제-여호수아가 해와 달의 운행을 멈추었을 때 과연 이계의 해와 달도 그 운행을 멈추었는지-를 토의하였던, 그야말로 하 수상하기 짝이 없는 시대였다.

물론 우리만 일방적으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게이트 너머의 이계-신들이 그들의 피조물을 위하여 만든 요람세계 툼볼리아- 역시 우리의 구세계(舊世界)에 대하여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마법도 신통도 구축해 버린 합리(合理)의 세계에서, 요람세계의 신들에게 속한 권속인 요람인들의 100배에 육박하는 인구를 자랑하며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기적을 넘어선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를 그들은 두려움을 담아 자생자(自生者)라고 불렀다. 어떠한 신의 피조물도 아니면서, 스스로 존재하며 강대하기 짝이 없는 ‘과학’이라는 권능을 부리는 자들이 그 힘을 내세워 요람세계를 정복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툼볼리아의 현인들은 근심하였다고 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비록 구세계와 요람세계는 연결되었지만(게이트를 없애려는 두 세계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핵을 사용해 보자는 의견은 결국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각하되었다.) 그대로 무방비하게 연결된 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열린 문을 결코 잠들지 않는 사려 깊은 문지기가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의견을 모은 구세계의 정부들 및 요람세계의 군주와 현인들은 게이트로 연결된 구세계와 요람세계의 일부 지역을 기존의 지배질서로부터 분리된 영역으로 만든 다음, 구세계와 요람세계 사이의 교류를 전속적으로 관장하는 기구의 관할하에 그 영역 내에서만 제한적인 교류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를 위하여 우선 국제연합은 게이트가 위치한 통일한국을 정치적 강압과 경제적 지원(급작스럽게 이루어진 흡수통일로 경제적으로 휘청거리던 통일한국으로서는 수백 조 원에 달하는 원조를 ‘호의’로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으로 어르고 달래어 게이트를 둘러싼 면적 약 60㎢의 땅을 국제연합 관할의 독립령으로 할양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에서 일어난 소동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회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7번 시도되었고 이에 질세라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9번 제안하였으며, 막바지에는 정부에서 원산 인근에 경비계엄의 선포까지 고려하였을 정도였다.) 툼볼리아에서 게이트가 위치한 아나스트라스는 게이트가 열릴 당시 한 드래곤의 영역이었는데 게이트가 열린 후 이루어진 퍼스트 컨택트(First contact)의 결과, 불미스럽게도 그 영역의 지배자였던 드래곤이 죽어 버렸기에 자연스럽게 수만 ㎢에 달하는 그 방대한 영역이 국제연합 산하 다세계교류관리기구, 흔히들 말하는 천라지망(天羅地網)의 관할이 되었다.

두 세계의 지배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두려워하며, 구질서를 수호하기 위하여 맺은 신성동맹. 그에 봉사하기 위하여 세계 사이에 열려 있는 문을 포위한 천라지망. 두 세계에 걸친 월경지(越境地)이자, 초차원의 투영된 그림자인 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는 위요지(圍繞地)인 원산-아나스트라스. 공용어를 쓰는 요람인들의 발음에 따라 이제는 『원스한』이 통칭이 된, 국제연합 고등판무관과 툼볼리아의 대마법사가 공동으로 다스리며 두 세계 사이의 교류가 유일하게 허용되는 곳. 평생 책장 속에서만 좇았던 모험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구세계의 모험가들, 다른 세계에서 한몫 잡기 위해 몰려온 뜨내기들, 평생 보고 싶은 것을 믿다가 이제는 믿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각종 비의전수자, 오컬트 매니아, 호사가들, 편리하기 짝이 없는 문명의 이기와 구세계의 문화를 즐기는 왕족이나 드래곤 같은 툼볼리아의 지배자들, 그들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구세계의 관광객들, 다른 세계의 경이를 연구하는 학자들, 검은 거래를 벌이는 국제범죄조직과 다른 세계의 금지된 환락을 추구하는 그 고객들, 게이트를 통해 모든 것이 거래되는 원스한에 팔려오거나 또는 스스로를 팔기 위해 찾아온 상품들, 어둠 속에서 천라지망의 눈을 피해 위대한 게임을 벌이는 각국의 정보기관들, 도피성을 찾아온 혁명가, 정치범, 난민, 현상수배자들과 그들의 암살자들.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이 도시에서 나는 사채업을 하고 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진 다음 날이라 그런지 공기가 맑은, 원스한에서 보기 드문 좋은 날씨였다. 천라지망의 관할인 원스한 내부에는 공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원스한은 두 세계의 재화를 빨아들여 그저 탐욕스럽게 소비하는 도시일 뿐이다), 천라지망의 통제하에 게이트를 거쳐 수입하는 석유 등을 이용하는 콤비나트가 원스한의 배후지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재(在)원스한엘프자조회(自助會)는 원스한 대기오염의 주범인 콤비나트의 존재에 대하여 천라지망에 대고 매년 불평했지만, 천라지망으로서도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다. 반강제적인 영토 할양의 대가로 한국은 게이트를 통한 원자재 수입에 있어서 특혜를 보장받았고, 영토 할양을 일종의 국치로 여기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나마 잠잠한 이유는 그러한 특혜에 기반하여 발전한 원스한 배후지의 산업단지들 때문이니까. 국제연합의 주권침탈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국제거래가격의 절반 이하인 채굴원가로 아나스트라스산 원유가 매일 50만 배럴씩 공급된다면 어떻게 참아 줄 수 있다는 식이랄까. 나의 조국은 그럭저럭 말이 통하는 상대인 셈이다.

“심심하네…”

“심심하신가요, 사장님?”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바로 반응이 돌아오자 순간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를 그렇게 만든 비서(그래, 비서) 자이킬은 언제나 그랬듯 빈틈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아직도 성장(盛裝)을 넘어, 화사한 미소로 완전무장(完全武裝)한 듯한 자이킬의 얼굴을 대하면 나도 정신이 어지러워져 말을 헤매는 수준이니, “여기 사장 나오라 그래!”에 대한 최종 수문장인 비서로서의 자이킬의 재능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것이 아닐까?

건드리면 묻어나올 것 같이 하얀 피부, 은발인가 생각하면 빛을 받은 곳이 부드러운 금빛으로 빛나는 백금발, 크고 깊은 녹색 눈에 척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이는, 옆으로 뻗어 나오다 살짝 밑으로 쳐진 평원 엘프 특유의 긴 귀까지. 말 그대로 인간과는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이 종족차를 여실히 느끼게 하는 자이킬은 아나스트라스 출신의 평원 엘프이자, 원스한 대학 경영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2급 마법 면허까지 가진 재원이었다. 뛰어난 재능에 과거 엘프 고왕국(古王國)을 세운 엘프의 귀족 격인 평원 엘프인 데다 다른 엘프들과도 격을 달리하는 아름다움까지, 이런 조그만 소규모 금융업…아니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나 같은 사채업자의 개인비서 노릇이나 하기에는 아깝기 짝이 없는 사람이지만, 결국 그녀는 툼볼리아 출신의 원스한 거류민, 천라지망의 제약을 벗어나 세계로 나갈 수 없는 신분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마다 내 속이 다 쓰릴 정도니 본인은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자이킬은 항상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착실하게 내 비서 노릇을 하고 있다.

“뭐 급히 처리할 일도 없는 데다 찾아오는 손님도 없으니…조금 심심하네.”

심심한 나머지 사장 의자(사무실마다 하나씩 있는, 검은 색의 크고 부담스러운 의자)에 앉아 빙빙 돌아라 놀이를 하다가, 어지러움을 참고 조금이나마 생산적으로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기 위하여 배달음식 광고책자로 손을 뻗던 내 귀에 자이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늘 아침에 아냐 씨가 사무실에 들리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엑?!”

나는 당황한 나머지 책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냐, 아나스타시아가 온다고?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오는 걸까…걱정되는데…”

“정산 때문인 게 아닐까요?”

자이킬은 모범적인 대답을 내놓았지만, 애석하게도 틀린 얘기였다. 아나스타시아는 내 고객, 한마디로 사채 쓴 채무자였지만 보통의 채무자가 아니었다. 채권자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 있는 채무자 甲이랄까? 전국사채업자협회에서 조사한(만약 그런 게 있다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고객 1위를 절대 놓치지 않을 위인이 바로 자이킬이 아냐라고 부르는 아나스타시아라는 인간이었다. 부하들을 시켜 창문을 깨고 돈 보따리(골드가 아닌 실버로 가득 찬)를 사무실에 던져 넣는 거라면 모를까, 아나스타시아 본인이 선량한 다른 채무자들처럼 고분고분히 정산을 위해 찾아올 리가 없었다.

쾅!

“여! 사장 나 왔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사무실 문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거칠게 활짝 열리더니 보무도 당당하게 아나스타시아가 등장했다. 아…벌써부터 위가 쓰리다…

“잘 있었어 사장? 아, 자이킬도 오랜만. 스카웃 제의는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 있잖아, 불쌍한 양민들 착취해서 불로소득을 취하는 저 악덕사장이 주는 월급의 2배 줄 테니까.”

“오랜만이에요, 아냐.”

언제 돈 떼일까 전전긍긍하는 그 악덕사장을 갈취하는 악덕채무자 주제에 들어오자마자 넉살 좋게 자이킬과 대화를 나눈 아나스타시아는 어정쩡하게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날 스윽 일별하더니 훗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계속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 할 말이라도 있냐는 식으로 그렇게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건 뭐냐 대체? 도발하는 거냐?

“그래서 무슨 일로 왔는지…? 아나스타시아.”

하지만 결국 난 어물어물 저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건 비굴한 게 아니고 어쩔 수 없는 거야. 한낱 사채업자가 아나스트라스 마피아의 보스에게 대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아나스타시아는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타오르는 불꽃 같이 붉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칼에 홍옥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를 지닌,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외모의 미소녀다. 그녀는 자신의 혈통에 고왕국 왕족의 피가 섞여 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하는데, 귀는 보통 인간과 똑같지만 평범한 인간에 비하면 이질적일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보면 확실히 무언가 인간과는 다른 종족의 피가 섞여 화려하게 피어난, 교잡(交雜)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엘프인 자이킬이 미소를 지으며 차를 건네는 때마저도 마치 그림에 그려진 가인(佳人)인 것처럼 느끼고야 마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라면, 아나스타시아는 순간을 박제된 사진으로만 접하던 미인과 가까이서 눈을 마주칠 때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현실감으로 가득한 아름다움이랄까? 자이킬의 말에 따르면 아나스타시아는 하프엘프 프린스들, 고왕국의 왕족과 인간 사이에서 난 사생아로서 봉지를 주어 변경의 가신으로 삼았던 이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결국 고왕국을 무너뜨리고 세계를 지배하던 왕족들을 평원 엘프라는 한낱 에스닉 그룹으로 만들었던 인간 가신들이 엘프와의 혼혈이었다는 게 좀 얄궂게 느껴지긴 하지만……아무튼 그녀의 혈관에 흐르는 피 덕분에 아나스타시아는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여고생 정도의 연령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외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겉보기엔 하프엘프 미소녀이더라도 속은 아나스트라스에서 최고로 흉악한 깡패 두목인 게 바로 아나스타시아 아나스트라스, 아나스트라스 청년향우회의 보스인 것이다.

“항상 함께 다니던 청년들이 안 보이네요.”

“미티와 란셀? 그 녀석들 과잉충성이랄까, 경호한답시고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 내버려 두고 왔어. 원스한 순사 나으리들과 괜히 얼굴 붉힐 일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하고. 혹시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냐고 징징대기에 성에 먼지 한 톨이라도 있으면 혀로 변기청소를 시키겠다고 말해 두고 왔으니 지금쯤 청소에 열심이지 않을까? 와하핫!”

미티와 란셀은 키가 2m에 달하는 근육질의 거한들로 끼니 때마다 사람을 한 명씩 잡아먹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더럽고 흉악한 외모를 자랑하는 아나스타시아의 경호원들이다. 아나스트라스 만에 빠뜨려 없앤 시체만 세 자리 수는 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바늘은 커녕 타정기로 박아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족속들이지만 아나스타시아 앞에서는 어린 양이나 다름없으니, 지금쯤 아나스타시아 말마따나 정말 열심히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아나스트라스 성의 청소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둘 다 향우회 간부급으로 전쟁에서 활약했던 장년의 나이인데 마치 사회초출의 애송이처럼 청년이라고 부르는 자이킬도 대단하구만. 뭐, 그녀의 나이에 비하면 둘 다 청년보다는 차라리 애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서 고릴라 같은 경호원들까지 물리면서 찾아온 이유가 뭐야?”

“아 그게 말이지.”

아나스타시아는 활짝 웃으며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이 폭탄을 던졌다.

“내가 사장한테 일전에 빌린 돈 있잖아? 아무래도 못 갚을 거 같아. 그냥 탕감해 줘.”

“그거야 뭐……에엑?! 탕감?!”

“아~ 그게 말야. 사장한테 빌린 돈으로 내가 돈놀이를 좀 했는데 말이지.”

…세상에 사채업자한테 돈 빌려서 돈놀이하는 인간이 어디 있냐? 아, 여기 있네요.

“여차저차해서 알게 된 드래곤한테 100만 골드 정도 빌려 줬는데 말야. 아~ 세상에 그걸 빠삭하니 다 말아먹었더라구. 드래곤이라서 자력 문제는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이번에 알아 두어야 할 교훈은 이거야 사장, 천하의 드래곤도 지불능력이 없을 때가 있다는 거. 드래곤이라면 돌을 먹고 똥으로 금이라도 쌀 줄 알았는데 말야.”

“잠…드래곤? 100만 골드?!”

골드는 천라지망이 발행하여 원스한에서 통용되는 공식 화폐이다. 본디 툼볼리아에서 보편적으로 거래되는 금과 태환할 수 있는 화폐로 기획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 천라지망의 해명이었지만……아무튼 30년 전 레트로 RPG에나 나올 법한 무성의한 이름으로 악명 높은 골드는 100실버와 가치가 같고, 대략 1골드 당 대한민국 원으로 1만 원 정도에 환전소에서 거래되고 있다. 그렇다는 얘기는,

“…지금 우리 회사가 굴리는 전체 자금의 반도 넘게 말아먹었다는 얘기를 한 거 같은데.”

“우와~ 사장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나 완전히 여기 우량고객이었네. 근데 야박하게 커피 한 잔 안 주나?”

……

천라지망은 그 목표로 두 세계 사이의 교류를 전면에 내걸고 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천라지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교류를 통제하는 것이다. 통제의 방법으로 천라지망이 동원한 수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은 통화(通貨)의 통제였다. 골드, 이 이름부터 병신 같은 화폐는 아마 두 세계의 역사에서 경제를 촉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해하는 것을 목표로 도입된 최초의 화폐일 것이다.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도 두 세계 사이의 교류를 그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망쳐 놓는 데 성공했다.

천라지망에 의하여 원스한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의 결제 및 공과금의 납부는 모두 골드로 이루어지도록 강제되었다. 문제는 그 두 가지를 빼면 도저히 써먹기 힘든 화폐가 골드라는 점인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원스한에 골드를 취급하는 은행이 없다는 데서 기인하는 문제였다. 천라지망이 만든 원스한 중앙은행이 있긴 하지만, 골드의 발권은행이기도 한 중앙은행은 고객의 예금에 대하여 이자를 주지 않는다는 실로 비범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취하고 있고, 그 결과 중앙은행에 대한 예금은 대규모 거래에서 결제를 위하여 수표를 발행하는 등 한정적인 목적을 위하여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동자본의 사용대가로서 이자를 얻을 수 없는 골드는 시간에 따른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하여 사용이 강제되나 막상 그 용처는 극도로 한정되어 있는 모순적인 화폐였고, 그런 점에서 화폐보다는 오히려 임시변통의 군표에 가까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쟁 중에 군표를 환전하는 환전상들이 나타난 것처럼, 나처럼 골드를 취급하는 사채업자가 등장하였다. 쓸데가 없어 골드를 놀리고 있는 사람에게 이자를 붙여 빌린 다음, 골드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좀 더 높은 이자를 붙인 채 대출하여 예대마진을 먹는 사실상 수신과 여신을 담당하는 은행 역할이라고나 할까. 음,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거 같군. 그래, 난 나쁘지 않아. 악의적으로 어수룩하게 만들어진 원스한의 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존재라고.

물론 규제를 벗어난 이런 사채업자나 프라이빗 뱅커들을 천라지망이 좋게 여길 리가 없으니……결국 이들 무허가 금융업체(천라지망의 상투적인 표현인데, 문제는 천라지망에는 허가절차도 무엇도 없다는 점이다)는 천라지망의 집요한 압박에 폐업하거나 아니면 범죄조직의 일부가 되어 원스한의 언더그라운드에 잠복하게 되었다. 나만 빼고는. 그리고 천라지망이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면서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내 앞에 서서 뻔뻔스럽게 채무를 탕감해 달라고 요구하는 아나스타시아 아나스트라스, 아나스트라스를 지배하는 악룡(惡龍) 그렌델에게 아버지를 잃은 후 저항군을 이끌며 그렌델의 폭정에 저항했던 아나스트라스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이 그렌델이 죽은 후 짧은 재위기간을 끝내기 직전 나에게 아나스트라스 전역에서 대부업을 하도록 허용하는 칙허(勅許, Charter)를 내렸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시아로부터 아나스트라스를 할양받으면서 기존의 구법질서를 보장하기로 약속한 천라지망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고깝더라도 어쩔 수 없이 특허 사채업자라는 나의 존재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나스트라스를 천라지망에 할양한 후 대공 시절 이끌던 부하들을 그대로 범죄집단으로 변모시켜 아나스트라스를 암중에서 주무르고 있는, 자칭 일개 불초 야인인 아나스타시아에게는 이렇게 진 빚이 있기 때문에 무담보로 돈을 빌려 달라는 대로 빌려 줬던 건데…그 결과는 이렇게 면전에서 해맑게 웃으며 채무 탕감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 돼! 피 같은 내 돈을 떼먹고 끝이라니 절대 안 돼! 아냐 당신 돈 많잖아! 아나스트라스의 알토란 같은 땅이란 땅은 다 가지고 있는데다 석유 채굴권 팔아서 꼬박꼬박 받는 돈도 있을 거 아냐?”

“사장, 그게 뭐 내 돈인 줄 알아? 물론 내 돈이지만! 그렇다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그렌델한테 죽은 사람들한테 향우회에서 지급하는 유족연금만 해도 다달이 20만 골드가 넘어. 최소한으로 부조하는 것만 해도 그래. 거기다 향우회 건사하는 비용도 장난 아니라고. 개발기금에도 돈 넣어야지, 천라지망 나으리들에게 세금 바쳐야지, 하다못해 다 썩은 아나스트라스 성 유지하는 데 깨지는 돈도 장난이 아니라고. 어차피 다 썩어서 비 들이치면 바닥에 말라붙은 똥냄새나 올라오는 폐건물인데 생각 같아선 그냥 싹 허물고 그 터에 러브호텔이나 짓고 싶지만, 노인네들이 하도 징징대서 그러지도 못한다니까. 아나스트라스 대공 내외의 침실이 있었던 자리의 스위트 룸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어필하면 꽤나 인기 좋을 거 같지 않아? 뭣하면 부모님이 쓰시던 침대가 있으니 들여놓아도 좋을 텐데. 아무튼 간에 지금 당장 사장에게 갚을 돈은 없어. 아, 그나저나 아냐라고 불렀네~♥”

“…아무튼 탕감은 안 돼. 진짜 안 돼.”

쉴 새 없이 떠들던(뭔가 패드립 같은 게 섞여 있었던 거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응, 기분 탓) 아나스타시아는 하아 하고 한숨을 폭 쉬더니 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뭐 탕감은 안 해 줘도 돼. 대신 언제 갚을 수 있을지 기약은 못하겠어. 됐지?”

……왜 인심 쓴다는 투로 말하는 거야? 생각해 보면 사정해야 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쪽 아닙니까?

뭐, 어쩔 수 없지. 상대방은 아나스트라스에서 최고의 악명을 자랑하는 깡패 두목이다. 아나스타시아는 본인은 나름대로 유머스럽게 표현한다고 하는 말마따나, 몸에 돌이 묶인 채 아나스트라스 만에 던져져서 미래 세대를 위한 화석연료의 원료가 되기 전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쓰라린…

“그런데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거야? 대체 그 드래곤은 돈을 다 어떻게 말아먹은 거야?”

“아~ 없어요. 없어. 나도 애들 이끌고 가서 둥지를 샅샅이 뒤졌는데 정말 달랑 1골드도 남은 게 없더라고. 둥지라고 말은 해도 말이지, 거기서 무슨 개판을 쳤는지 다 무너져서 밖에서 거지꼴로 노숙하고 있더라니까. 나 참. 아무튼 돈이 없으니 이거라도 가져왔어.”

그렇게 말한 후 아나스타시아는 휙 하고 돌아 자신의 뒤에 있던 무언가를 잡아챈 다음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은…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노란 우의로 몸을 다 가리고 있어서 간신히 작은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는…잠깐 사람?

“이…이거가 아니지 아냐! 돈이 없다고 사람을 데려오면 어떡해?! 요람세계의 인신담보는 원스한에서는 공서양속에 반해서 무효란 말이야! 요람인의 인신매매는 천라지망의 법원에서 최고형을 선고할 수 있는 중죄인데 천라지망이 알면 옳다구나 하고 나를 감옥에 처넣을…읍.”
손을 내밀어 내 입을 막은 아냐는 당장이라도 으헤헤 하고 웃을 듯이 입꼬리가 올라간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폭탄, 아니 요전에 던진 폭탄을 애들 장난처럼 느끼게 만드는 엄청난 폭탄을 던졌다. 나는 그 때 그녀가 했던 말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얘가 그 드래곤이야.”

……

“으븝…으브븝”

“아이 참, 간지럽게. 혀로 침 묻히지 마. 혹시 이거 성추행?”

“그럴 리가 있냐?! 근데…방금 뭐라고?”

“성추행 아니냐고 했는데. 그리고 방금 또 아냐라고 불렀지?”

“그게 아니라! …제발 좀! 이…이게 뭐라고?”

손을 떨면서 커다란 우비 속에 숨은 듯한 형상의 사람(?)을 가리키자 아나스타시아는 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손을 뻗어 우비를 거칠게 벗겨내었다.

우비를 벗겨내자 나타난 것은…유심히 살펴보면 원래는 하얀 색의 튜닉 같은 것이었다고 그럭저럭 인정할 수 있는, 그러나 지금은 때가 타고 찢겨져서 넝마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걸친 10살 정도로 보이는 조그만 소녀였다. 바닥까지 닿는 찬란한 금발에 하얀 피부. 자이킬 같은 평원 엘프처럼 길지는 않지만 살짝 뾰족하게 위로 뻗친 귀. 아나스타시아가 거칠게 다뤘는지 얼굴에 검댕 같은 게 묻어 있는 데다, 꼬맹이 주제에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다 겨우 일어나 보니 키우던 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고 스스로를 소개할 법한,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자이킬이나 아나스타시아를 접하면서 미인에게는 익숙해진 나로서도 보는 순간 찬탄을 감출 수 없는, 마치 설화석고로 만든 인형 같은 화려한 미모였다. 날렵하게 위로 뻗친 귀 하며 정오의 햇빛이 쏟아지는 듯한 금발까지, 언뜻 보면 금발과 그 미모로 유명한 숲 엘프로 착각할 법한 외모였지만, 한 가지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마치 녹인 금과 같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금동(金瞳)이 바로 그것이었다. 신들의 권속인 요람인은 그 누구도 황금신족(黃金神族)의 상징인 금동을 가질 수 없었다. 금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속자로서의 신위를 버린 채 필멸자의 육신을 입고 요람세계에 강림한 황금신족의 후예이자 신에게 지음받지 않은 지배자인, 드래곤뿐인 것이다.

“짜쟌~ 얘가 그 100만 골드를 해 드신 드래곤이랍니다. 신체포기각서까지 쓰면서 변제는 문제없다고 장담하길래 안심하고 빌려 줬는데, 정말 남은 게 몸뚱이 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가져 왔지. 이걸로 국을 끓여먹든 어떻게 하든 간에 충당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네.”

“……”

“아, 근데 드래곤은 게이트 넘을 때 천라지망에 무조건 신고하고 무지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원스한 체류 허가받아야 되는 거 알지? 내 일신상의 사정으로 신고 같은 거 안 하고 데리고 왔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얘는 지금 원스한에 불법체류중인 대포드래곤이라고 할까? 걸리면 골치 아파질 테니 조심하라고, 사장.”

위에 구멍이 뚫릴 거 같다……

아나스타시아는 올 때 그랬듯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자마자 순식간에 문을 박차고 돌아가 버렸다. 휑한 사무실에 남겨진 것은 마치 정물처럼 다소곳이 자신의 자리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킬과 아나스타시아와 대면할 때의 모습 그대로 얼빠진 채 굳어 있는 나, 그리고 더러운 넝마 조각만을 걸친 채 오도카니 맨발로 서서 가끔씩 눈을 굴려 슬며시 나를 훔쳐보는, 이른바 대포드래곤뿐이었다.

1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자이킬이 천천히 일어나 커피 포트에 물을 넣고 올렸다. 아마 저…드래곤에게 커피를 대접할 모양인데, 그렇다고 나도 사장답게 어떻게든 말을 해서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지. 어디까지나 얼치기지만 드래곤이 쓰는 언어인 용언(Draconian)을 그럭저럭 쓸 줄 아니까 한번 말을 걸어 볼까.

『저기…이름이 어떻게 되지?』

갑자기 말을 걸자 화들짝 놀란 드래곤이 툼볼리아의 공용어로 대답했다.

“지…『지배자의 언어』로 말하는 자생자라니 저…정체가 뭐냐!”

…기껏 용언으로 물었는데 공용어로 대답하니까 좀 뻘줌해지는데요.

아무튼 그렇게 말을 트게 되어 공용어로 진행된 대화에 따르면, 내 앞에 있는 드래곤의 이름(그러니까 드래곤 외에는 구사할 줄 모르는 용언으로 된 진명 말고, 다른 종족들이 부를 수 있도록 공용어로 번역된 통칭)은 아우구스타 마냐 아잘레아, 툼볼리아의 세력(歲曆)으로 500살 정도 되는 황금룡(黃金龍)이었다. 통상의 드래곤이라면 부모의 익하(翼下)를 벗어나 겨우 독립할 무렵의, 드래곤의 기준에서 볼 때 젊다기보다는 어리다고 하는 것이 맞는 나이인데 자신의 둥지를 튼 것도 대단하지만, 100만 골드와 함께 그걸 날려먹고 거지꼴로 노숙하고 있었다는 게 어찌 보면 더욱 대단하다.

“…근데 대체 100만 골드나 빌려서 무얼 하려고 했어?”

“우…”

“잘 안 들리는데?”

“그게 게이트를…내 둥지에서 바로 통하는 게이트를 뚫는 데 실험을 할 돈이 필요해서…”

…정정한다. 이건 대단한 정도가 아니다. 요람세계에 강하한 황금신족이 낳은 자식들, 드래곤으로 태어난 첫 세대인 신화적 고룡(古龍)들과 대마법사들이 달려들어도 그 정체를 규명하는 데 실패한 게이트를 꼭 인터넷이라도 연결하는 것처럼 둥지에 뚫겠다고 덤비다니 이건…엄청난 바보다…

“그래서 게이트를 뚫기 위한 실험을 하다 게이트는 못 뚫고 둥지가 자리한 산의 지맥을 터뜨리는 바람에 둥지는 터져나온 용암에 매몰되고 알거지가 되셨다? 그 뒤로 망가진 둥지 근처에서 노숙하다 빚 독촉하러 온 아나스타시아한테 잡혀서 여기까지 끌려온 거고?”

끄덕끄덕

“그래…”

끄덕끄덕

…이걸 대체 어쩐다? 툼볼리아에는 우리 인간과 거의 비슷한 주류 종족인 ‘인간’ 외에도 여러 이종족이 있었고, 그들은 원스한에서 천라지망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다. 인간보다 뛰어난 재능과 용모, 엄청난 수명을 자랑하며 보편적 선망의 대상이 되는 엘프, 주술적 ‘역병‘(우습게도 WHO는 이를 근거로 툼볼리아의 흡혈종과 수인종이 자신들의 관장사항에 속한다며 천라지망과 지리한 권한 다툼을 벌인 적이 있다)의 전염원이기에 엄중한 관리를 받는 흡혈귀와 수인 등 여러 특별한 종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드래곤은 제일 특별했다. 비록 신위(神位)를 버리고 필멸자로 강하했지만 여전히 일말의 신위(神威)를 가지고 있는 이 신들의 말예는, 전력을 다하면 툼볼리아를 어렵지 않게 점령할 수 있다고 암암리에 인정되는 구세계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라지망은 드래곤의 존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원스한 내에서 드래곤을 통제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 원스한 내에 천라지망에 게이트 이용 신고도 하지 않고 사전에 체류 허가도 받지 않은 드래곤이 활보하다 걸리면? 그 때는 내 사채업 특허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애시당초 아나스타시아가 생각 없이 그녀를 데리고 천라지망 모르게 게이트를 넘어온 일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으니 재차 요행을 바라고 게이트를 넘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다.

“저기…”

“응?”

지금까지 주눅 든 느낌으로 묻는 말에만 고분고분 대답하던 마냐(그녀를 아우구스타라고 부르려는 날 제지한 자이킬의 말에 따르면, 마냐를 아우구스타로 부르는 것은 나를 인간 수컷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나. 뒤에 붙은 아잘레아는 어디까지나 일족 명칭이니 간단히 호칭할 때는 마냐로 불러야 한다고 한다)는 눈을 바삐 굴리며 눈치를 살피다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역시『사장』의 밤 시중을 들어야 하는 건가?”

……

엥이?!

“저기, 미안하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무서운 여자가 그랬다. 난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으니까 빚을 갚으려면 몸으로 갚는 수밖에 없다고…신체포기각서까지 썼으니 『사장』의 음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밤낮으로 몸을 굴리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몸으로 사장한테 빚을 갚은 사람이 지금까지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아나스타시아 이 여자 대체 무슨 소릴 하고 다니는 거야?!”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아니, 드래곤이라는 것도 문제의 일부지만) 겉보기에 10살 정도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애를 건드리진 않는다! 가만, 이렇게 말하니까 나이만 차면 건드릴 수도 있다는 것 같잖아? 안 건드려! 채무를 빌미로 채무자를 건드리는 짓은 안 한다고!

“…저기 자이킬, 요즘 원스한 최저임금이 얼마지?”

“시급 55실버입니다. 24시부터 06시까지는 75실버이구요.”

“좋아, 마냐, 네가 빌려서 날린 돈이 우수리 떼고 100만 골드, 아나스타시아와의 계약서를 보니 100만 골드를 연이자 40%로 빌렸더군? 하지만 난 연이자 24%로 아나스타시아에게 빌려 줬으니 24%로 계산해 주지. 다른 돈 갚을 방법이 생길 때까지 넌 오늘부터 우리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청소하고 빨래하는 잡무를 해 줘야겠어. 하루 24시간 일한다 치고, 먹고 자고 입는 데 드는 비용 까고 하루에 12골드씩 이자에서부터 까 주지. 참고로 오늘까지쌓인 이자를 합친 총 채무액은 112만 골드야.”

내 말을 들은 마냐는 앙증맞은 손가락을 놀리면서 뭔가 계산을 하다니, 금세 울상이 되어 외쳤다.

“뭐…뭔가 이상하다 사장! 하루 종일 일해서 변제해 봤자 오히려 빚이 늘어나기만 한다!”

“그거야 네 사정이고. 그게 싫으면 내 피 같은 돈을 갚아! 당장 갚아!”

“사…사장……”

이렇게 해서 마냐, 무정하게 늘어나는 빚과 절망적으로 싸우는 대포드래곤 식모가 우리 사무실에 들어오게 되었다. 인간도 아니라는 마냐의 비명과, 졸지에 100만 골드가 허공에 날아간 나의 눈물을 뒤로 한 채……

댓글

가장 많이 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