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사무라이 (2003) review by 이토 케이카쿠

일본인은 찍을 수 없는, 일본인의 "얼굴" 이야기

Introduction

크게 말하면, 일본에는 일본1과 일본2와 일본3이 존재한다.

하지만, 에릭송의 <루비콘 비치>에서 나오는 아메리카1, 아메리카2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1이란, 요컨대 우리가 사는 일본을 뜻한다. 보통 사람은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 없는, 단단한 현실인 지금 여기. 일본2란, 그 "기저현실(by <BLAME!>)"를 근거로하여 생성된, 현실의 열화 복사본들, 그러니까 일본영화거나 일본 소설이거나 일본 드라마같은 것들을 이른다.

그리고, <일본 3>이 존재한다. 그건 해외에서 생산된 일본을 뜻한다.

일본 3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케이리 히로유키 타가우가 훈도시 하나 차고 "어이, 벌써 없어졌다구~"하면서 금발 백인 누님 등 뒤에 서서 스시를 젓가락으로 먹는 세계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초등학교인가 중학교 시절에, 이즈의 하토야에서는 뒤에서 돈을 쓰면 미역술을 마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물론 "타카하시 명인이 체포되었다" "노란색 응급차"와 같은 종류이겠지만, 이건 얼마나 유명한 도시괴담일런지). <코우하이>의 형사가 <일본통>인 형사 죤 코넬리의 자택에 가봤더니, 코넬리가 습자를 하고 있는 세계다(여담이지만, <라이징 선>의 <일승日昇>이란 문자가 큰 북과 함께 쿵쿵하고 확대되는 오프닝은, 카일 쿠퍼가 한 짓이기도 하다). 클라이튼의 원작에서는 하마구치사였다가, 영화에서는 하마구리사가 되는 세계다. "나는, 오오이시, 크라노스케다"라고 독일인이 말하지만 일본인에겐 들리지 않아 일본어 자막이 흐르는 세계다.(여담이지만, <베를린 츄신구라>의 무대는 베를린이 아니라, 함부르크였다) "파칭코는살암을망튄다"라고 크리스토퍼 란버트가 말하는 세계다. 나구모따위에게는 맡길 수 없다던지 어쩌던지, 진주만까지 야마모토 오십육세 (by 마코)가 출장을 나가는 세계다. 마코로 이어서 말하면, 금만사의 회장이 "완전 무능한 아메리카인들이구만! 너희들은 비만에 태만하다고!"라고 뛰어난 운율 감각을 선보이는 일본어로, 오무니사의 중역에게 화를 내는 세계다. 그 페킨파마저도, <킬러 엘리트>란 희귀품에서 <일본3>를 다루거나 한다.

물론, 우리도 사정은 거기서 거기다. <가메라 2>의 오프닝에 NSA직원이나 해외 보도는 일본인이 직접 봐도 에이 저건 아니지 싶은 맥없는 연기였다. 일본영화에 나오는 백인 중에 오케이할만한 경우가 얼마나 있을런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케이드로부터 이식되온 메가드라이브의 슈팅 게임 <제로윙(아아 그리운 동아 플랜)>의 해외판 오프닝에 등장하는 말도 안되는 영어 "All your base are bleong to us"는 아메리카에서 폭발적인 웃음을 일으켜, AYBABTU란 약어를 검색해보면 카테고리에 나올 정도다. (참고로, 이 "AYABABTU" Flash가 걸작)

우리들이 <일본3>를 즐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태클(츳코미)이다.

무엇을 감추랴 (별로 감추지도 않았다만), 나는 <일본 3>에 얕은 매니아다. 그러니까, <일본>을 그린 외국영화는 이미, 보기 전부터 "어디에 츳코미를 넣을까"라고 붙잡을 생각을 가득채우고 보거나 한다.

그래도, 그것뿐만, 아니, 그것에 얽매여서 영화 그 자체가 가진 유력한 힘을 놓쳐버린다면,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언갈 놀리는 거야, 뭐, 즐거운 일이긴 하지만.


Cast and Crew

그렇기에, 일본인 캐릭터가 대량출연, 와타나베 켄도 나와, 사나다 히로유키도 나와, 세간에서는 화두가 되고 있는 이 영화.

주연은 아시는 대로, 톰 크루즈. 코유키씨의 신장은 170cm입니다만, 이 영화의 코유키가 톰 옆에 붙어있는 장면을 보고, 톰의 신장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을 돌려보고는, 발판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버립니다만, 그런 저는 신장 162의 난쟁이입니다.

최후의 사무라이, 카츠모토 모리츠구에는 와타나베 켄. 목소리가 좋지, 이 사람. 그 심복인 우지오에는, 살진이 정해진 사나다 히로유키. 평소 행동거지부터 차를 달이는 것까지,  어쨌거나 장면 만들기 하나하나가 멋짐다. 주인공에게 남편을 잃으면서까지도, 주인공을 돌봐주는 히로인에는 코유키씨. 지금까지 이 사람에게 섹슈얼한 걸 느낀 적은 없습니다만, 이 영화의 코유키, 에로합니다.

감독은 <글로리>, <마셜 로우>의 에드워드 즈윅. <전차의 용기>의 <진상>이나, <글로리>의 흑인병사, <마셜 로우>의 이슬람계 주민에 대한 (9.11 이후를 생각하면 선구적이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공포에 의한 차별감정의 전파를 묘사하는 걸 보면,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이진 않지만) 반 네오콘, 반 부쉬라고 할까, 쁘띠 좌파라고나 할까, 꽤나 리베럴한 밸런스 중시주의, 나쁘게 말하면 정치적으로는 우등생적인 포지션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뭐어, 많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네오콘 일색>처럼 보이는 (그것도 또한 편견입니다만) 아메리카에 있어서는 의외로 (일본인이 보기엔) "양심파"에 속하지 않을까요. 다만, 그것과 동시에 <영화작가>로서의 진면목이란 것도 있어서, 일탈이나 광기나 서프라이즈가 없는, 라는 점도 있습니다. 그런 정치적인 감각은 <라스트 사무라이>에도 투영되어 있다는 점을 말할 필요가 없겠죠.

각본은 <글래디에이터>의 존 로건. 뭐랄까, 다 보고 나서 <글래디에이터의 각본가>란 소리를 듣고, 아아 그렇네 하는 느낌과 납득이 몰려들었습니다. 이야기적으로도, 역사적 사실을 픽션으로 다루는 것도.

음악은 짐머. 언제나처럼 한스 짐머. 이거, 뭔가 유행어라도 되는 것 같아요. 수수께끼의 납득감을 뿌린다고나 할까. "음악은 짐머" "아.. 역시나"같은. "음악은 짐머, 프로듀서는 카이머" 아아.. 그렇구만.."

그래서 별 달리 다른 점을 보여주지 않는 한스 짐머 ... 이겠지만, 사운드 트랙을 사버렸습니다, 응응. 가끔씩 <글래디에이터>가 들리거나, 진주만이 들리거나, 하면 더 이상 오너한 자기모방 모드에 돌입한 게 잘 보이는 사운드 트랙입니다만 ... 그래도 8곡 째부터 라스트까지 흐름은 어쩔 수 없이, 파블로프 상태로 불끈불끈 타오릅니다. 일본식 큰북(태고)가 후렴과 함께 울리는 곳에서는 울음이 쏟아져 나옵니다. 제가 단순한 건 알고 있습니다. 이런 걸로 타올라서는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타오릅니다. 막 타오릅니다. 리핏으로 사운드 트랙 걸어둡니다.


Plot summary

기억해낸다. 기억해내고 싶지 않을 걸 기억해낸다.

기억해낼 뿐만 아니라, 눈 앞에서 선명하게 펼쳐진다.

비전투원, 이라고 하면 빼앗아 온 각각의 인격을 신경쓰지 않고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자이며 자식이며 노인이었다. 거기에서 그저 살고 있는 자들. 자신의 총이 등뒤를 쏘자, 그들은 쓰러진다. 원주민들. 인디언들. 크게 소리지르는 비명이 들려와, 그저 계속 들려와서, 그걸 막기 위해서는 알콜밖에 없었다. 그저 항상 취한채로,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등과, 그것이 현실임을, 멀어지게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남북 전쟁의 영웅,  네이선 올그런 대위의 지금의 모습이다.

게티스버그, 앤티덤 ... 네이선이 헤쳐온 전장도, 이제는 환상처럼 느껴진다. 명령이라지만 상관 배글리 대위의, 죄 없는 인간들을 학살에 저항할 수 없었던 자신, 그 죄에 대한 의식이, 수치심이, 그를 강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게티스버그전의 영령을 위로하는 장소에서, 링컨은 말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치라고. 그러나 그 나라에, 그가 있을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이 나라가, 이 도시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내'가 피투성이라는 사실을. 피의 웅덩이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그런 그 자신은, 지금은 윈체스터 사의 총의 프로모션으로 스테이지의 환대용인 이름뿐인 영웅. 술에 쩔어, 죄의식을 멀어지게 하지 않으면 무너져버릴 듯한 그런 나날을 살고 있다.

그런 네이선 앞에 과거의 부하가 나타났다.

그가 데려간 레스토랑에는 그 배글리와, 본적없는 풍모의 외국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오오무라. 쟈판, 일본의 엠페러가 보내온 사자였다.

손에 든 테크놀러지로 관리할 수 있는 정보의 용량을 자각한 에도 막부는, 제어가능한 변수를 줄이기 위해, 200년의 긴 시간동안 나라를 쇄국하고, 정보를 제어해왔다. 그러나, 서구의 강렬한 기술의 발전과 확장주의는, 사방이 바다란 파티션을 넘을 수 있는 코스트를, 극단적으로 저하할 만큼 발전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육운력의 수십배란 운송능력을 가진 해운력은, 그 본래의 힘을 바루히하기 시작했다. 바깥 세계, 그것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던 일본국내는 분열해, 권모술수와 투쟁의 끝에, 막부는 쓰러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체제가 세워졌다.

테크놀러지. 그것이 새로운 국가인 서구에 대한 독립을 이겨 얻어낼 수 있는 열쇠였다. 공부성, 이란 테크놀러지와 엔지니어링 그 자체를 이름으로 한 정부기관이 설립되고, 철도가 놓여지고 전신이 놓여졌다. 서구의 무기와, 서구의 군정시스템과, 서구의 전술이 도입되었다.

그러한 테크놀러지들을 일본에 가져와, 도입하는, 정부 혹은 개인에게 고용된 외국인들.

그들은 YATOI, "용병" 외국인라고 불리었다.

일본에 서구식의 군대 존재방식을 도입하는 인간. 고액의 개런티로 영웅 네이선은, 재벌이 잇는 신정부의 참의, 오오무라로부터 그 일을 오퍼받았다. 서구의 기술과 전술로 무장할 새로운 군대가 싸울 것은, 아직 남아있는 국내의 반동분자. 최후의 사무라이, 카츠모토의 군대다.

1876년, 용병으로 네이선은 일본 땅에 내리게 되었다. 이국의 알콜 '사케'로 도망치면서, 바로 조금 전까지 농민이었던 사람에게, 총을 쓰는 법, 바이요넷의 붙이는 법, 대형을 이루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카츠모토의 세력이 오오무라가 놓은 철도를 습격할 거란 정보가 들어온다. 싸우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네이선은 판단을 무시하고, 카스터는 카츠모토의 토벌에 군을 동원한다.

그러나, 네이선의 판단을 옳았다. 카츠모토의 부대와 조우한 신정부군의 전선은 빠르게 붕괴했다. 숲 속임에도 불구하고, 기마상태에서 정확히 습격해 오는, 갑옷 무사들. 전쟁에서 고립된 네이선은 필사의 저항을 해보지만, 상처를 입고 대지에 눕고 만다. 그의 수급을 노리는 한 사무라이가 다가온다. 그러나, 그가 칼을 들어올린 순간, 네이선은 최후의 저항을 한다. 옆에 놓여 있던, 부러진 창을 엉겁결에 찔러, 무사의 목을 찌른 것이다.

그를 쓰러뜨리자, 둘러쌓고 있던 사무라이들이 일제히 뛰쳐오르려는 순간,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가 그들을 저지한다.

그 소리야 말로, 반란 분자의 수령, 신정부의 원참의, 카츠모토의 목소리였다.

과거에 외국인 용병이었던 네이선 올그린 대위는 사로잡혔다. 그는 카츠모토가 거점으로 하는 마을에 끌려가, 거기에서 수당을 받으며 상처가 낫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쫓아오는 네이티브의 비명. 그는 이국의 마루에 쓰러져, 이 나라에 와서 배운 몇 안되는 말 중에서,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것의 이름을 소리지르고 또 지르며, 그것을 바랬다. 사케. 술. 그러나, 그건 주어지지 않았고, 네이선은 계속해서 악몽에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상처는 나았고, 그는 감시역이라고 생각하는 조용한 노인에게 부축받아,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거기서 만난 카츠모토는 "눈이 녹아, 길이 지나갈 수 있을 때까지는 여기서 나가지 말라. 그때까지는 남도록"이라고 했다. 이렇게해서, 이국의 반란분자의 마을에서, 올그린의 기묘한 생활이 시작했다.

마을에서 살면서 <사무라이>들의 사는 방법을 접하게 된 올그린. 거기에는 그가 항상 바라였지만 얻을 수 없었던, 혼의 안녕이 있었다...


Review

이 여화의 비평 패턴, 이라고 하면 왠지 지금도 상상이 간다. 뭐어, 무지막지하게 트로피컬한 식생의 숲이라든가, 원형의 논바닥 (원형의 논 자체는, 주로 신사의 봉납미용으로 기후岐阜에 실재하긴 합니다만) 이라던가, 수수께끼인 읽을 수 없는 간판, 이라던가 닌자라던가. 그러한 빤한 <츳코미>계는 당연히 있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의 제대로 된 비평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구조라고 하면, 할리우드 오리엔탈리즘이나 엑조티즘을 동원한 축제용의 패턴으로, 전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본 극장에서 뒤에 있던 커플의 젊은이는 "뭐랄까-, 별로 공감할 수가 없었어. 늑대와 함께 춤을, 이라고 있었잖아? 톰 크루즈 나오는. 그거랑 같이 외국인을 본 느낌이야" 라고 여자친구에게 말했습니다만, 그에 대해서 "늑대와 함께 춤을은 케빈 코스너라구, 알겠나 자네"같은 츳코미는 넘겨두고, 그는 이 영화가 이제부터 각종 영화 비평에서 그렇게 말해질 요소에 해당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마 진실에 가장 가까운 자세이긴 합니다만, 아마도, 가장 상상력이 없는 인간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그려진 일본을, 자본주의 아래에서 잃어버린 어떤 종류의 미학,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해도, 웨버에 의하면 그것이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성립시킨 도착이 있습니다만)과 퓰리타니즘의 조잡한 혼합물로, 스피리츄얼리즘을 조금 어레인지먼트한 정신주의의, 이상향으로 그려지기 위해 "이용"당했다는 견해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게 옳습니다. <늑대와 함께 춤을> <라스트 오브 모히칸>에서 네이티브들이 그렇게 "이용"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일본은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가져올 필요도 없이, 서구에 의한 이국이란 어떤 종류의 수수께끼같은 세계이며, 그렇기에 서구자신이 갖는, 혹은 서구자신이 잃어버린 옛것, 다양한 것이 거기에 구실삼아져 왔다. 이상향도 그 중 하나다.

사무라이는 막부말에 철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서구>와 그 열화복사본인 신정부와, <낙원>의 차이를 세우기 위해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현실이다. 그러니까 이 사무라이들은 총을 사용하지 않고, 갑옷으로 몸을 지킨다. 과거에 막부의 참의였지만 지금은 물러나, 산간에 머문다는 카츠모토의 설정은, 사이고를 크게 의식한 것이겠지. 그러나, 이 영화가 서남전쟁을 그대로 그려서는, 카츠모토에게 어떤 종류의 이상향을 맡길 수밖에 없었겠지. 그는, 철포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11/26 추가 : 라고 썼는데, 신푸렌이란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미아아안~ 즈윅&로건~ 난 일본인 실격이야~ 위에서 안이한 츳코미는 하지 말자고 했는데 이런 결과가~).

그러니까, 여기에 그려진 "무사도"란, 실은 서구 자신이 갖고 있는 어떤 종류의 "잃어버린 미학", 퓨리타니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변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엑조티즘이 가져다주는 스피리츄얼한 불가해감을 어레인지했을 뿐. 그리고, 그러한 영화는 과거에도 인디언에게 맡겨져서 그려져 왔던 것이다.

이런 것이, 아마 가장 올바른 견해이긴 하다. <올바른>이란 점 이외에도, 이케 감독이 여러한 아메리카의 전쟁영화를 <내용을 묻지 않고> 전부다 매도하는 9.11 이후의 혐미 무드에 있어서는, 그러한 견해를 취하는 편이 적당히 입을 맞추기 좋고, 적당히 비스듬히 잡아서, 말하자면 형편 좋은 스노비에 머리좋은 견해란 "쓰기 편하다"란 덤도 딸려온다.

하지만, 아까도 적은 것처럼, 그건 아마도 가장 누구나 생각하기 쉽고, 재미없는 견해이리기도 하다. 그런 견해를 이 영화로부터 끄집어낼 여유가 있다면, <오리엔탈리즘>을 재독하는 쪽이 좋다. 왜냐면, 그런 건 모두 알고 있잖아? 이건 포기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서구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일본인마저도, 이국을 볼 때 도망칠 수 없는 정신이다. 아니, 이국 따위일 필요가 없다. 같은 나라의, 옆 사람. "너"가 "내"가 아닌 이상, 그러한 견해는 개인 레벨에서는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걸 적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 거기서 끝나는 비평은 의미가 없다.

그것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일그러진 형태로 <엑조티즘>을, 다른 누구도 아닌 일본인인 우리 자신이, 확인하는 일은 기묘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동이란 무엇인가. 그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의 얼굴의 아름다움이다.

일본 제일의 썰리는 역, 후쿠모토 세이조가, 말하지 않는 사무라이로 화면에 등장했을 때, 나는 엄청 놀랐다. 얼마나 <좋은 얼굴>인가. 그렇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들은 모두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좋은 사람>이라던가, 선인이라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이상하달까, 시간을 새기고 있달까, 깊은 맛이 우러나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미 이런저런 영화에 등장해버려서 익숙해져 버린 스카다 슌이, 마지막까지 스카다 슌임을 알 수 없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 근거한다. 물론, 수염 가발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다른 어떤 일본영화에 나오지 않은 <좋은 얼굴>이다.

그들 뿐만 아니다. 와타나베 켄도, 코유키도, 사나다 히로유키도, 왠지, 다른 나라의, 다른 시간을 살아온 듯한, 이해해 끝낼 수 없는, 매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이건 그야말로 아메리카인이 네이티브나 이국인을 보는 듯이, 색안경적인, 어떤 종류의 사상을 자기 멋대로 대상에게 위탁한, 차별적인 그런 감각일지도 모른다. 텔레비젼에서도, 잡지에서도, 영화에서도 익숙해져있을 그들의 얼굴이, 왠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이국의 인간이 일본일을 찍는 일. 영화란 것의 기묘한 힘이 여기에 있다.

이 힘은 자각적인 착각 영화 <킬빌>에도, 진정한 착각 영화 <라이징 선>에도 없었다. <킬빌>에 있어서, 쿠리야마 치아키는 쿠리야마 치아키일 수밖에 없었고, 마로 아키지, 쿠니무라 쥰도 본인일 수밖에 없었다(뭐, 그것만으로도 타란티노가 일본영화 네이트브한 혼의 근저를 촬영했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 영화의 와타나베 켄도, 사나다 히로유키도, 명확히 일본영화에서는 머금지 않은 기묘한 음영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그것도, 캐릭터나 이야기에 의해서가 아니다. 앵글, 광선을 받는 방향, 그러한 필름 그 자체의 <룩>에 의한 것으로 말이다. 너무나도 익숙해져 왔던 것을, 한 번 객관화할 수 있는 때에 찾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 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리들리 스콧의 <블랙 레인>에서도, 켄 씨의 얼굴이, 왠지 보지 못했던 음영을 채워서, 일종의 조각과 같은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던 것을 생각해 낸다. <블랙 레인>에 비치는 오오사카의 거리는, 로케에 의한 현실의 풍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블레이드 러너처럼 보였을 때, 거기서 우리들은 <익숙해진 풍경>이 실은 <낯선 모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마치, 외국인이 본 일본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필름.

영화란 그러한 <촬영자의 시선을 나타내는> 기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영화로 밖에 얻을 수 없는 체험이지만, 그 힘을 가진 필름이란 실로 적다. 그리고, 그 감동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로 치면 <외부의 당사자>인 일본인 자신이란 사실은, 꽤나 얻기 힘든 적은 기회의 체험이다.

이 영화는 일본인의 <얼굴>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면 <쁘띠 네셔널리즘>과 같아서 싫지만)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맛보게 해주는 귀중한 영화체험을 제공해준다. 특히나 후쿠모토 세이조의. 익숙해진 일본인의 얼굴을, 외국인의 시선과 필름이란 필터를 거쳐서, 이화한다, 는 것이다.

영화가 영화인 힘을, 창작자가 계산치 못한 채, 우리들 일본인에게 전해주었다.


Spoiler (네타바레)

이렇게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써놨습니다만, 그건 놓아두고, 다른 이야기. 이영화, 실은 캐릭터 모에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걸 실감한건, 클라이막스, 합전 바로 전. 어린이와의 "언제나 무서웠다"는 장면 끝에, 스카다 슌이 연기하는 수염이 잔뜩 난 사무라이, 나카오가 "올그린, 적의 군세가 옵니다"하고 뛰쳐 나온다. 그 대사 한 마디로, 주인공과의 연결이 거의 그려지지 않았던 이 인물과, 올그린과의 관계에 있는 우정이랄까 이해랄까 인연이랄까 하는 것이, 한 번에 펼쳐져 감동했습니다. 문자만으로는 어찌되도 좋을 대사인데도, 스카다 슌의 연기랄까, 말하는 방법이 정말로 그를 <동지>로써, 같은 혼을 가진 자로써 인정하는 듯한, 거의 퉁명스러운듯한 말하는 방식으로, 솔직하게, 이 "올그린, 적의 군세가 옵니다"란 어찌되도 상관없는 대사야 말로,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가장 감동한 대사일지도 모릅니다. 그려지지 않았던 부분의 넓이를 이 한 마디로 획득하는 건, 이 대사를 쓴 사람의 대단함인가, 스카다 슌의 대단함인가.

그리고 뭣보다 후쿠모토 세이조. 정말이지, 와, 뭐랄까 후쿠모토 세이조 모에 영화인가요 이거. 대사는 마지막에 하나 뿐인데, 올그린에게 붙어다니는 정말이지 이 인물이 뭐라하든 멋있습니다. 창작자와 유머러스한 연기로써 이 캐릭터들을 파악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웃음은 없고 쭉 멋있음. 특히나 카츠모토와의 대화에서 올그린이 목소리를 거칠게 냈을 때, 속공으로 달려든 후쿠모 세이조. 그 몸놀림. 그 잡기. 이걸 멋있다 외에 뭐라 설명합니까.

그리고, 사나다 히로유키. 이게 또 아주 좋습니다. 칼을 잡는 법. 살진. <사무라이의 포즈의 멋있음>을 일람한 듯한 포즈만을 선택해 보여주이는 듯한, 그런 멋있음. 특히 칼을 신발로 세우는 움직임은, 이게 보고 싶었다, 하는 듯한 팔의 움직임, 타이밍, 근육의 사용법. 최근의 시대극에는 오랜만에 순정 일본풍의 액션의, 랄까 <장면 만들기>의 <움직임>의 아름다움이랄까 멋있음을 보여주었단 느낌입니다. 이 <장면 만들기>와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건, 실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에는 있을 수 없는, 풀 사이즈의 인물을 파종내지 않고 비출 수 있는 영화란 al디어만이 표현가능한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떨런지.

와타나베 켄은 조금 오버 액트 느낌이지 않나, 싶었습니다. 면도하는 모습은 좋았습니다만. 그래도 역시 좋은 목소리였지.

그리고 코유키,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 나왓습니다만, 처음으로 코유키씨 좋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왠지 입술을 닫는 모습이 에로합니다. 갑옷을 씌워주는 장면에서, 톰의 몸에 옷을 입혀주는 손이 이게 또 에로합니다. 키스 그 자체는 별로 관능적이지 않았지만, 옷을 입혀주는 장면은 쭉 에로합니다.

그리고 어전에서 흰장갑을 하고 연미복입을 요인들이 쭉 늘어서있는 풍경도 왠지 이상한 모양새라서 좋았습니다. 뭐랄까, 나카무라 시치조지, 훌륭할 정도로 상전의 얼굴인지라 나이스. 대사의 얼버무림도 젊은 천황같아서 굳. 그리고 후라다 마사토가 의외로 호연. 그 수염에 속어넘어간 것일 뿐인지도 모릅니다만, "아아 저런 느낌 있지 있어"하는 전형적인 이디엇트 지휘관 짓에 훌륭할 정도라 빠져버릴 정도입니다. "너~언 센스! 풀어택!"도 완전 폭소. 살아가면서 한 번쯤 말해보고 싶네요 "넌센스".  어쨌거나, 라스트에 덜덜 떨며 뒷걸음치는 연기가 나이스. 뭣보다, 이 역에 관해서는 연기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와 좋았다, 라고나 할까요. 연기자라고 하는 건, 알기 쉬운 연기라고나 할까 전형을 연기하는 걸 싫어하니까 말이죠. 타입 캐스팅을 할 수 없다는 건, 섬세한 연기의 필요어쩌구 보다도,일본이란 나라의 연기자의 폭이 빈곤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이 영화, 일본인 연기자들이 좋아요. 꽤나. 잘못하면 일본 영화에 나올 때보다도 매력적일 정도로. 그런 앙상블이, 이 영화를 "캐러 모에/모에(燃え/萌え)" 영화로 만드는 듯한 느낌이 듭닌다. 뭐랄까, 이 사무라이로 동인지 만들지 않을까요 (웃음) ? 라고 할 정도로. 일본인들이 실로 좋은 캐릭터만 맡고 있습니다.

또한, 설정적으로도 미묘하게 오타쿠가 타오를만한 요소가 있어서, 예를 들면 닌자같은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닌자는 아니겠지!"라고 츳코미를 합니다만, 일본의 만화야 애니메에서는 지금도 닌자의 기술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다, 란 설정의 일상 장난 장르가 있어서, 궁내정의 음양사라던가 그런 설정의 작품도 있으니까, 나님적으로는 허가, 라고나 할까 오히려 괜찮잖아, 설령 그걸 일본인이 했다면 불만은 없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제도물어>도, 그 메이지 45년의 그 시점에서 츠치미카도 가(家)가 가지기도를 해서 식신을 불러낸다던가 했으니까, 이 영화의 닌자도 있을만 하잖아, 하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천황의 밀정>이라던가 <메이지 정부의 밀정>이라고 문자로 써보면, 기전물같아서 완전 괜찮잖아, 아니 오히려 타오를잖아, 이 설정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제도>에서, 츠치미카도 가는 그 시대에 있어서 주술을 부리는 픽셔널한 존재로써 설정되어, 메이지 천황의 붕어와 함께 "시대로부터 필요없어진 존재"로 그 끝을 상징적으로 그린다, 라는 점에서 <라스트 사무라이>와 같은 방식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 영화에서 츳코미를 해야만 하는 겁니까. 뭐어, 스스로도 이 정도면 견강부회구나, 하고 생각합니다만.

뭐, 닌자는 그렇다고 쳐도, 트로피컬한 식생의 숲이라던가 읽을 수 없는 간판이라던가 하는 점은 변명할 수 없는 츳코미칠 부분입니다. (언제나처럼) 큰 즐거움으로 삼아봅시다. 다만, <원형의 논>은 실재하고, 카츠모토도, 예전에는 신정부의 원로원에서 참의를 했던 (즉, 신정부설립의 설립자중 하나였다) 건 작중에서 제대로 그려져 있으니까, 영어를 할 줄 알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선택은 아주 계획적으로, 기본적인 영어만으로 제한했고 말이죠). 아마도, 카츠모토와 그 나름 서양에 정통한 인물이지 않았을까요. 일원적으로 서양을 부정한다고 하면 <<적을 알기>>  위해 주인공을 데려올 필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적어도 그는 <<배울 의사>>는 제대로 갖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가 지적으로 호기심 왕성한 인물이라는 건, 주인공의 수첩을 읽는 장면이나, 와타나베 켄의 연기에 의해, 슬쩍 슬쩍 보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거기서부터 생각해보면, 그는 서양이 싫은 게 아니라, 무사도의 상실을 한탄하는 인물이겠지요.

차전(車田)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형의 논에 <<모르게 츳코미>>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빈다만, <카츠모토의 영어>는 꽤나 위의 설명으로 어떻게든 될 정도라서, 물론, 그게 각본상의 편의주의라는 건 확실합니다만, 부자연한 설정은 아니겠지요. 그러한 "영화에서 그려진 디테일을 근거로, 좀 읽어들어가면" 납득할 수 있는 레벨을 츳코미 해봐야 꽤나 부끄러운 기분이 듭니다만 ... 츳코미해서 좋은 건 좀 더 답이 없는 부분에만 한정해두는 게 좋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보기 안 좋거든). "둥근 논이라니 이상하네~"하고 득의 양양하게 말했는데 "아니, 원래 그거 일본에 실재한대"하면 쪽팔리잖아요?

인터넷을 돌아다녀보면, 실재로, 그 나름 근거가 있는 디테일을, 외국인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건 꽤나 지금까지 없었던 현상으로, 재밌기는 합니다. 이걸로 기억해 낸 것이 "진짜 두부는 아메리카에 많다"라고 하는 <<맛의 달인>>의 이야기. 일본은 효율화를 위해서, 응고제의 활용등으로 진짜 두부는 적어졌지만, 아미레카는 가르쳐 준 대로 만들기 때문에, 진짜 맛이 나는 두부가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맛의 달인>>의 이 이야기는 마유츠바에 있어서도, 그것에 가깝다는 것이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적인 디테일을 모르는 사람이, 자료를 근거로 만든 (착각은 있다고 해도) 이 영화, 츳코미할 장소가 아닌 곳에 츳코미를 해서 득의양양해져버리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일어난 듯합니다.

여기서 보이는 <우리 일본인은, 일본에 대해 점점 무지해지고 있다>란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외국영화의 <일본>그러니까 전술한 일본3에 대해서, 츳코미할 자료를 잃은 날도, 그리지 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별 거 없이 캐러 모에 영화에 즐거운 캐릭터 대집합인 이 <라스트 사무라이> 누가 이걸로 동인지 만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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