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NieR:Automata』리뷰. 끝나지않는 세계와 시작되지 않는 이야기


[번역]『NieR:Automata』리뷰. 끝나지않는 세계와 시작되지 않는 이야기

※이 기사는 『NieR:Automata』의 엔딩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언제적인지 윤곽이 뚜렷치 않을 정도로 흐릿한 기억이지만, 영화에 관한 서적을 독파하고 있을 시기에 어떤 문장과 만났다. 그건 많은 저자가 손을 대어 고금의 명작영화에 관한 단평을 실은 평론집 중 하나일 뿐인지라, 그 평론을 실은 자가 어느 분인지 당시의 나로선 관심이 없었지만, 그게 영화「블레이드 러너」에 관한 것이었음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좌우 양페이지로 수 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리뷰 안에서 지금도 마음에 선명히 남은 부분은 영화 그 자체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저자에게 있어「종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의 멸망이라던가 세계의 종말이 아주 큰 재해나 전쟁에 의해, 한 순간에, 혹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분명 진정한 종말이란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있던 것들을 순식간에 전부 날려버리는 상냥한 것이 아니라, 좀 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 서서히 진행되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침식해서, 그리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어느새인가 그 종이 멸망한다. 아마도 종말이란 그러한, 완만하고 조용한 것이다」. 요지로서는 그러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쓴지도 모르는 그 평론에 강렬한 충격을 받은 뒤 수년이 지나, 성장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했던 결과, 새삼 생각한다.「종말이란 분명, 그러한 완만하고 조용한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러한 생각 방식이 엔터테인먼트 작품에 있어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정의 그 자체에 대한 커다란 시사점을 안고 있다.
액션 RPG『NieR:Automata(이하, 니어 오토마타)』는, 일단 독립된 하나의 작품이지만, 시계열적으로는 전작인『NieR Gestalt/Replicant(니어 게슈탈트/레플리칸트』의 완전한 속편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적어도 전작의 예비지식은 필수불가결하다. 『드래그 온 드라군』의 이른바 신주쿠 엔딩「E엔딩」에서 파생된 것이『니어 게슈탈트/레플리칸트』이며, 그것의 D엔딩의 파생이『니어 오토마타』이다. 각 작품마다 약 1000년에서부터 수 천년의 시간이 흘렀다곤 해도, 이 세 작품(정확히는 한 작품의 엔딩과 두 작품)의 흐름과 역사에 이야기 골격으로선 단절이 없으며, 연속성이 거기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의미로서는 연작이라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그 연작의 최신작인 본작에서 그려지는『니어 오토마타』의 세계의 가장 차갑고 무서운 부분은, 「종말의 시작으로부터 수 천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계는 종말을 완료하지 않았다」라는 부분이다. 세계의 종말은 그 종말을 완료하고 나서야, 다음 세계로 그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거의 종언을 맞이한 세계가 「완만한 종말인 채로 계속 멈춰서있다」는 상태 속에서는, 종말 후에 있어야 할 새로운 이야기가 절대로 시작되지 않는다. 즉 『니어 오토마타』 속에서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커녕, 애초에 그 존재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건 「인류라는 종교」와 「자아라는 저주」가 만연한 세계 속에서 아름답게 춤추는 인형들의 무도 뿐이다.

기적적인 매력을 갖춘 캐릭터와 시스템

그 부분을 다루기 이전에, 캐릭터 조형과 게임 부분의 특색에 대해 이야기 해두어야 할 것이다. 특히 캐릭터의 조형과 움직임의 아름다움이란 부분에 관해, 이 게임은 기적적이라고 할 만한 성공을 이루었다. 그저 아름다운 것만도 아니고, 그저 귀여운 것만도 아니다. 아마도 천사의 맹목성 오마쥬일 「눈을 가린」의상. 전투 때의 늠름함과 에로티시즘의 융합. 그 모든 요소가 「인형=안드로이드」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설득력을 갖는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는 음악, 황폐해진 무기질한 세계와 캐릭터의 매칭은 발군이며, 어떠한 한 씬을 잘라내어도 일종의 화면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건 훌륭하다, 한 마디 뿐이다.

게임을 통해서 느껴지는, 일견 문법을 크게 비트는 듯이 「시각청각」으로 다이렉트하게 들어오는 세계관은, 「JRPG」란 장르의 작품이, 먼 미래란 설정을 살리면서도 게임에서 「판타지」의 새로운 정의를 개척한 성공예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게임 부분과 겹치는 부분이긴 하지만, 액션의 움직임도 개발팀이 플래티넘 게임즈로 옮긴 것이 그 공을 노래하고 있다. 『베요네타』스럽다, 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전투 시스템은 직감적이며, 주인공을 「병기」로써 뚜렷하게 한 움직임의 상쾌함은, 다른 오픈월드 게임의 추종을 불허한다.「해킹」의 슈팅 게임요소에 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다만, 개인적으론 「해킹 능력을 구사하여 싸운다」는, 설정으로서는 자주 있으면서도 액션 게임에선 시스템으로 설득력 있게 짜넣어지지 않았던 요소를, 잘 요리했다고 느낀다. 강적과 싸울 때, 익숙해지면 평범하게 싸우는 것보다도 훨씬 단시간에 승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밸런스도 양호하다. 단, 슈팅게임이란 장르 자체가 일부 매니아용으로만 만들어지는 현 상황을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유저가 많은 것도 수긍할만하다.
더해서 강화칩에 따라 개성을 낼 수 있는 커스터마이징, 설정을 살린 패스트 트레벨의 시스템 등, 몰입감을 촉진시키는 요소도 고려해 만들어졌으며, 게임 시스템 상에 결점이랄만한 결점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진화점은, 멀티 엔딩에 주차 플레이가 전제인 게임이면서도, 주차 플레이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만큼 줄인 전체 게임 구성이리라. 같은 이야기룰 보더라도 미묘하게 각도가 다르다는 전작에서 호평이었던 부분을 남겨두면서도, 그 외의 코어한 부분을「보여주는 방식」을 스무스하고 슬림화한 방법론은 매우 우수하다.

단, 게임 전체를 부감할 경우 스트레스를 느끼게 하는 흠도 또한 존재한다. 오픈월드일 의미가 없을 정도로 변화를 찾아볼 수 없는 경치는, 패스트 트레벨이 꽤나 뒷 부분에야 사용가능해지는 것도 합쳐져서, 엄청난 폐허 매니아가 아닌 이상에야 플레이를 지루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또한 계속해서 출현하는 엇비슷한 적들. 이야기로선 복선도 엮여 잘 고려되어있고, 주차 플레이 때엔 또 할 필요가 없는 비교적 친절한 시스템이긴 하지만, 계속해서 거의 같은 내용을 돌려막는 듯한 서브퀘스트도 고통스러운 점 중 하나다. 애초에 억지로 오픈월드란, 지금에선 정의도 애매한 시스템을 주장할 필요가 있었나 하고 느끼는 부분이 꽤나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건 부정적인 의견은 아니나, 때때로 게임 속에서 메타적인 부분이 슬쩍 보이는 게 노리고 만든 것일까. 예를 들면 아주아주 특수한 트로피 취득시스템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게임의 특징을 억누르고 게임일 필요를 부정하는 게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것도, 그걸 즐거운 장난이라 볼지 어떨지는 개인의 기호에 따르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종합적으로 보면, 플레이 감각으로선 혁신적이진 않지만, 매우 잘 만들어진 액션RPG다. 때때로 버그의 보고도 있지만, 꽤나 빠른 스피드로 패치가 나오는 걸 생각하면 그리 큰 문제는 아니리라.

「자아란 저주」

『니어』의 세계관 속에서, 「자아」는 저주에 가까운 것이라기보단 저주 그 자체다. 전작『니어 게슈탈트/레플리칸트』에서는, 인류의 혼인 게슈탈트체의 그릇이어야 할, 레플리칸트가 자아를 취득해버린 일은, 스토리 그 자체의 근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 저주는 항상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며, 인류로선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결말로 향해간다.『니어 오토마타』에서 자아도 역시 저주이며, 첨언하면 일종의 전염병같은 것이다. 자아를 갖지 못한 자가 장기간에 걸쳐 다른 자아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자아가 전파된다. 어쩌면, 일반론적으로 말해지는 이른바「자아」와 본작품군 속의 「자아」는, 닮아있어도「별종의 성질을 갖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안드로이드는 감정을 갖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기계생명체는 애초에 행동을 컨트롤 당하던 일종의 도구였다. 그러나 금지되었어도 안드로이드의 자아 억제는 서서히이긴 하지만 듣지 않게 되며, 기계생명체도 또한 네트워크에서 단절됨으로써 그 자아를 확립해 간다. 자아는 다른 자아를 접하는 것으로 자기 증식, 자기 증대를 반복하며, 저주의 전파가 퍼져 감에 따라, 그 저주에 걸린 자들에겐 비대화한 「자아를 갖는 생물」로써의 고통도 동시에 지게 된다. 그 저주는 항상 슬픔과 자기만족, 그리고 고독 밖에 낳지 못한다. 불행하게도, 자아를 갖는 일에「익숙치 않은」그들은, 실로 순수하게 그 고통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자신으로써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아를 형성하여 유지하는 일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뇌를 동반하는가,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우리들도 싫을 정도로 잔뜩 맛보았던 그것을, 그들은 개체별로 따로따로 맛보게 된다. 누군가와 이해을 나눈다는 기쁨도, 무언가에게 인정받는 행복이란 성장과정의 완충재도, 마음에 싹트는 「사랑」의 형태도 가르침 받지 못하며, 그것이 보답받는 일 따윈 절대로 없다. 그 아무것도 없는 채로 넘겨진 외톨이 「자아」가, 고통 그 자체 이외의 것일 수 없단 사실은 누가봐도 자명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 자아라는 저주가 또 다시 자아라는 저주를 부르는 하나의 결과를「해피 엔딩」이라 부르는 일은, 조금 도가 지나친 잔혹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경박함을 선하다고 보는 것 또한 인간의 업보일런지 모른다.

「인간이란 종교」

핵심은 게임의 진행도에 맞추어 스토리 적으로 분명해지만, 그 부분을 알든 모르든, 이 게임의 기본축은 「인류를 위해서 싸우는 달의 안드로이드」와 「에일리언의 병기인 기계생명체」와의 싸움이다. 전작을 플레이했던, 혹은 진상을 알고 있는 인간이라면, 이 시점에서 이미 일종의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 전작의 여러 엔딩 중에 「인류 존속」의 가능성이 있는 엔딩은 D엔딩(*진엔딩)은 물론이요, 그 이외의 엔딩군 중에서도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 천년 후에, 안드로이드들은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것이 어찌 그리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간단하지만, 문제의 본질은『니어 레플리칸트』 후의 세계에서 인류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게 아니다. 본질은「인류를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이 전작으로부터 수 천 년뒤인 그 때에도 안드로이드의 개체 / 군체 베이스로「계승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의 무슨 목적으로 그리 되었는지와도 상관없이,「인류」란 이름의 확고한 종교가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적인 기계생명체도 또한「인류」의 활동을 모방하면서, 「가족」「연애」「국가」「철학」「양심」그 외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이상할 정도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류가 정말로 존재하고 있는가 어떤가하는 문제를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안드로이드 측, 기계생명체 측, 양쪽에 보이는 인류에 대한 집착은, 지금까지도 거기가「인류란 개념」에 의해 지배되는 장소란 확신적 의미를 갖으며, 인류란 옛 세계가 지금도 종말의 연옥 속에 사로잡혀 있음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구세대의 개념이 남아 있다면 종말의 완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새롭게 시작되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에 그려지는 세계는「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라「아포칼립스」 와중에 영원히 남겨진 무간지옥이다.

「그 광기는 누구의 광기인가」

더해서 본작에서는, 안드로이드의 이해곤란한 언동이나 파괴를 향한 충동, 인간이란 개념을 이해하려고 한 나머지 폭주해버린 기계생명체의 기괴한 행동이 의도적으로 그려져 있다만, 그걸 기계의 광기라 지칭해 버리는 건, 아마도 인식의 그 시작점에서부터 좌절된다. 언어의 본질적 의미로써,「광기」라는 건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다. 극중에서 그들 인형들의 행동은 절대로 광기따위가 아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제정신이다. 왜냐하면 그 행동원리가 바로 인간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의, 기계인형의, 꼭두각시의, 로봇의 광기를 비웃는다면, 우선 그 행동을 「광기」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제정신을 먼저 의심해야 하리라.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들이 생활하는 이 현실세계따윈, 이미 예전에 광기에 침식되어 있다. 종말이 극도로 완만하게 침식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현실도 이미 그러할지 모른다. 알아차리지 못한 건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신을 우둔하게 만드는 방어 본능이던가, 아니면 우리들 개개의 인간이 더는 절망적일 정도로 미쳐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니어 오토마타』가 갖는 그 잔혹한 매력은, 그「인간이란 것에 집착하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다. 고의적으로 종말에 멈춰서있기에 언제까지고 시작되지 않는 이야기」 속이기에 두드러지는, 극도로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는 인형들의 너무나 순수한 무도의 아름다움에 근거하는 부분이 크다. 이야기가 없기에, 그 안에서 부각되는 「자아」의 지옥은 선명해지며, 그 한없이 덧없는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져가는 순간, 고상하고 순수한 것이 타락하는 순간을 목격하곤, 그것을 무상이자 극상의 「미美」 그 자체라고 느껴버린다. 실로 악취미적인 이야기다.

그 아름다우면서도 악의에 가득찬 질문이 종료되는 때에, 플레이어의 눈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그건「종말이 어찌되었든, 그 때 느낀 기분은 진심이다」 같은 자기합리화의 번지르르함을 허락할 정도로 상냥함조차 주어지지 않는 매정하고구제할 도리 없는「복음」이다. 거기에 쓸쓸함을 느낀다면 마음에 구멍이 나 있을지도 모르며, 슬픔을 느낀다면 불쌍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이든, 「끝없는 종말」을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끼리, 수 천년 뒤인 세계의 안드로이드 혹은 기계생명체가, 그 인형들이, 디스플레이를 통해 이쪽을 끊임없이, 그 붉게 물든 눈을 외면하는 일 없이,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Originally published at jp.automaton.am on March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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