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갓챠맨 크라우즈 인사이트>의 플랫 디자인 ~ "현실"과 "애니메"의 경계를 융합하는 인터페이스
(*역자 주 : 왼쪽 위에 있는 방향키로 카메라 조절이 가능하다)
"애니메 캐릭터가 <현실의> 풍경으로 내려왔다!"고 소박하게 입을 떼는 것은 가능하지만,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는 좀 더 복잡하다. "현실의" 광경을 실사적으로 그려내는 일은, "성지순례"라는 말이 주목받기 시작한 2000년대 후반부터 이미 당연한 광경이 되었으며, 또 실사 영상에 애니메이션을 겹치는 수법은 <메리 포핀스>를 끌고 들어오지 않아도 애니메이션의 역사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다. 거기에 있는 건 "현실"과 "애니메이션"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단층이 있으며, 그것을 어디까지나 따로따로 레이어를 있으며 그걸 겹쳐올려서,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시각체험을 제공한다... 는 발상이다. 반면 <갓챠맨 크라우즈 인사이트>의 오프닝 영상의 혁신은 절대로 패널을 현실에 두는 일도, "겹치는" 레이어의 표현도 아니고 -- 아니, 그것들이 있음으로 해서 밑에서 지적할 점들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만 -- 제 3의 레이어인 "스마트 폰의 인터페이스"를 들고 들어온 일이다.
이 인터페이스들은 애니메에서 "그려진" 공간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동시에 우리가 평소에 접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들과 그들이 보고 있는 건 "같은" 디지털 질감을 갖는, 스마트 폰의 인터페이스이다. 여기서 스마트 폰을 조작하는 "육체"의 존재는 잊고서, 순수하게 한 가지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두 세계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가? 애초에 어째서 그들을 "애니메적인 선으로 그려진"이라고 말하는가. 거기엔 "이건 그려진 것이다"란 신앙이 있다. 즉, 붓이나 잉크를 사용해서 -- 그것들이 디지털이라도 좋다, 많은 애플리케이션은 "현실" 세계에 익숙해진 도구를 모방한다 -- 그려진, 현실이란 "일차 세계"와 분리된 "이차적인" 레이어에 있는 세계라는 (신앙). 그리고 실사 영화는 어째서 그것들과 구별되는가? 그건 비디오 카메라라는 기재가 인간의 안구가 광학적으로 정보를 뇌에 집어넣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촬영된 영상은 안구가 붙잡은 것과 같은 "일차 세계"의 정확한 "본뜸"이기 때문이다 ... 이것 또한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구나 붓이란 메타포를 떼어내고, 그대로 디지털 화면을 봤을 때, 거기에 박음질 자국은 있는 것일까. 디지털이란 사상은, 결국 모든 것을 0과 1의 집합으로부터 생성하는 "정보"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정보적으로 처리되어, 비트의 점점인 집합이라고 생각하면 "실사"도 "애니메이션"도 같은 소재에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그들... 아니, "우리들"과 같은 질감의 텍스쳐를 갖는 스마트 폰의 인터 페이스를 통해서, 같은 식으로 정보에 액세스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스마트 폰의 화면도 또한 디지털이다). 디지털의, 박음질 자국 없는 평면에서는, 모든 게 "우리들의 세계"의 이벤트다. "본뜸"의 "근본"이 되는 "현실"적인 것 따윈 없다. 그 평면에서는, 스마트 폰의 인터페이스를 통해서 누구나가 시나브로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당신이 아니메따위와 거리가 먼 일상을 살더라도.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인간"과 "캐릭터"의 구별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디지털 화면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 차이는 "육체"의 유무나 텍스쳐의 차이에 있지 않다. 어떻게든 차이를 찾고 싶다면, 움직임이나 입주변 표현 등, 더 다른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것마저 애매하게 되어 있다는 게 나의 사견이다만... 이것은 다른 기회가 있다면 또 다시)
* 플랫 디자인의 컨셉에 대해서는 다음의 링크를 참조.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