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로망스(이야기)의 신께서는 병이 취향 (by 이토 케이카쿠)
일단락
~ 사람이 죽는다곤 생각하고 있었으나 내가 죽는다니 이건 참을 수 없군
무명
그래서, 목요일, 마지막 항암제를 받았습니다. 마지막이라곤 해도 전위하면 물론 마지막이 되지 않으므로, 이게 끝일까, 이 뒤로 나는 몇 년이나 이 병과 어울려줘야 하는 걸까, 관에 들어가는 그 날까지,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뭐, 다음에 암이 발견되는 날까지는 이 약과도 작별이기에, 조금 체력적으로 편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빨리 머리털도 나주지 않으려라나.
그래도 의외로 사이드 이펙트가 길게 이어져서, 월요일인 지금 꽤 우웩우웩입니다. 배의 상태도 폭탄을 안고 있는 듯해서, 꽤나 움찔움찔 거리고 있습니다. 친구의 티켓을 받은 관계로 토요일의 <입식사열전>의 첫 개봉일엔 힘내서 가봤습니다만,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수전 손수택은 "은유로써 병"에서 과거에 "결핵"이 그러했듯이, "병"에 들러붙는 신화성, 문학성을 해체하여, "그저 병"으로써 병과 관계할 방법을 찾았지만, 이건 그녀 자신이 유방암을 앓았으며, 그 싸움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며(병과 "싸운다"는 표현 자체가, 문학적인 연막으로써 신화성을 이미 띠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서두) 암이나 에이즈란 "죽음에 이르는 병"의 말하자면 허풍에서 벗어나긴 어려울 듯합니다.
병, 그 자체가 무언가의 은유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뭐 까놓고 말해서 무좀이나 사면발이는 아름다운 문학의 은유로 기능하지 않으니까요) "죽음"이라는 벗어나기 어려운 문학적이고 신화적인 존재를 향하여, 지연된 시간으로써 거기서부터 "병"은 기능하기 때문에, "죽음"이 문학적인 사건인 이상에야 병도 또한 은유로써의 기능을 연명하겠지요.
가라타니 고진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손택에 대하여
병이 치료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메타포로부터 해방될 것이라 그녀가 말하는 경우에는, 그 때 암환자는 암 그 자체로 해방되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한편, 암이란 은유로 불리는 사태 쪽에서는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 한, 또 다른 은유로 불리울 것이다 (병이란 의미)
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암이란 은유라 불리는 사태"는 다양한 은유를 담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명시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지장은 없습니다. 자기 증식성이나 복사의 에러 등, 암이 갖는 다른 은유의 가능성은 "죽음"에 의해 권위가 부여되는 것으로, 같은 기능을 가진 은유라면, 다른 병이나 세포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암이 "죽음"이라는 문학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은유도 "덤"으로 붙는 것이며, 그 반대는 아닙니다.
그렇기에 은유로써 병이, 문학으로부터 사라질 순간은 아마도, 사람이 죽는 존재인 한에서 찾아올 일이 없을 것입니다.
나도 지금 일기를 되돌아보면, 암이란 "죽음의 가능성"을 현전케하는 무력한 존재로써, 이런저런 언어를 써서 자신의 현상을 치장해왔다 (칭얼거림이라고도 할 만한) 는 게 남아 있어서, "죽음의 계절"을 넘어서 보면, 그 거침이 부끄러운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은유로써 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빠져 있는 상황을 얼마나 "이용"하여, "미화"하고, "가여워 하는"가 하는 나르시즘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것을 기피하면서도 이야기 되기 지치지 않는 "죽음"이란 존재. 아마, 사람이 죽지 않게 되었을 때, 문학도 영화도, 아니 문화가 소멸할 테니까, "은유로써 병"은 문학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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