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하는 죽은 자들 by 이토 케이카쿠

우리들이 사자(死者)에게 안식이 있기를, 하고 바라는 이유는 뭘까.
그건 사자가 이따금 안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자의 날뛰는 혼은, 우리들의, 생자의 세계를 증오로 몰아넣는다.

무서운 일이지만, 그에 의해 국가 체제 일부가 지탱되는 나라도 많이 존재하니, 죽은 자의 나라란 강대한 세력이다. 분명 예전부터 있어온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영역을 갖지 않는 국가. 개개인의 기억을 노드로 해서, 국가와 국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제국.

우리들이 <뮌헨>의 마지막 컷에서 목격하는 "두개의 탑"은, 그 제국이 우리들의 현실에 침입하기 위한 교두보이며 바로 그렇기에 강 저 편에 우뚝 솟아 있어야만 했다.

즉, 우리들이 "피안"이라 형용하는 장소에.



"저 편"이란 무슨 뜻일까.

우리의 이해도 상상도 거부하는 영역이 차안(此岸 ; 이 편)으로 침입해온다는 전조. 그건 초기 스필버그 작품 속에서 끊이지 않고 그려진 모티브였다. <미지와의 조우>는 바로 그런 "예고"만으로 구성된 영화였으며, 전조를 느낀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 보자 거기서 "저 편"이 내려온다. 공개 당시에 이미 마더 쉽이 영화의 메타포라는 지적이 있었다고 한다. 쿠로사와 키요시 씨, 아오야마 신지 씨 등이 논객으로 참여한 <로스트 인 아메리카>란 서적에서는, 그것이 "영화"라기보다는 어떤 대문자의 영화적 존재("시네마"로 형용된다), 영화존재임을 보장하는 프레임적 이념, 혹은 규범이 아닐까 하는 해석이 야스이 유타카 씨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강림하여, 일종의 강제력으로 인간을 유린하는 절대적 존재. 그건 적어도 <미지와의 조우>에선 적대적(適對的)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인디아나 존스 : 잃어버린 성궤의 추격자>에서 "계약의 상자"의 내용물을 목격한 자들은 비참한 운명에 다다르게 된다. 정기를 빨려, 안면이 녹아내려, 모조리 몸을 망치게 되는 나치의 병사들. 이 장면을 인디아나 존스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모두들 아는 대로다.

"보지 마라"

헨리 존즈 주니어 교수와 히로인인 마리온은, 그저 눈을 꾹 감고, 덮쳐 드는 사자들의 이미지를 거부함으로써 이해를 넘은 영역의 위협을 넘길 수 있었다. E.T.가 돌아가는 별에 소년 엘리엇은 따라갈 수 없다. 세상 어딘가에서 수만 명의 목숨을 한 순간에 빼앗은 빛이 작렬하는 순간. 성배에 의해 주어지는 "불사"의 세계. 그 외에도 스필버그 작품에선 "저 편"의 존재가 항상 "이미지"로 보여지거나 감춰지거나 해왔다.



스필버그는 장르 영화만 찍어온 영화작가다. 특히 SF에 관해서는 (정의논쟁은 제쳐두고) 확실히 SF로 구분되는 작품만으로도 <미지와의 조우>로 시작해서, <E.T.> <쥬라기 공원> <잃어버린 세계> <A.I.> <마이너리티 리포트> <우주전쟁> 7편이나 된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7편, 제작 순으로 SF작품을 늘어나 보면, <잃어버린 세계>와 <A.I> 사이에 하나의 빗금을 긋고 싶은 충동에 휩쌓인다. 거기에는 명확한 단절, 혹은 전환이 놓아져 있다.

<A.I>는 2001년에 공개된 영화다. 즉, 이 빗금은 전세기와 금세기의 경계를 가리키는 선이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오고서 얼마 되지 않아, 스필버그는 이 영화에서 인류를 지면에서 지워 없애고 로봇이 죽은 자에게 안겨있는 풍경으로 그 막을 열었다.

그런 영화의 공개부터 3개월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두 개의 탑이 맨하튼에서 붕괴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물론, 유대인인 그에게 있어 죽은 자란 바로 역사다.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에서 이미, 스필버그는 "죽은 자에 의한 역사"의 극한을 이야기해왔으니까.  21세기를 한달음에 넘고서 스필버그가 시작한 일은, 그때까지 그려온 "저 편"이, 실은 "죽은 자의 나라"이며 더해서 "역사" 그 자체임을 받아들여 그것이 "지금, 여기"의 우리들을 얼마나 주박(呪縛 ; 저주하여 속박함)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이야기한 것이었다. 즉, 21세기에 들어서 제작한 세 편의 SF 영화는, <뮌헨>를 준비하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온 것이다.



<뮌헨>에서 주인공 아브너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그가 실제로 목격하지 않았을 이미지다. 뺨에 총알을 맞아, 복부가 질척질척하게 된 이스라엘의 선수들. 독일 경찰의 미스로, 공항에서 사살된 게릴라와 남겨진 인질들. 스필버그의 "바탕"인 어떤 즉물적 폭력 묘사에 의해 구성된 이 이미지들은, 아내와 섹스할 때조차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주박이지만, 주인공은 그 "죽은 자들의 이미지"를 실제로는 본 적이 없다.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 죽은 자의 이미지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끌어올 필요도 없이,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국가 체제는 이런 "죽은 자들의 제국"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거의 같은 구성을 갖는 영화가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예지능력자들이 환시하는 "살인"의 이미지는, 주인공들 "범죄예방국"이 먼저 침투해 막아내기에 결과적으로는 "일어날 리 없었던" 살인의 기록이다.

프리코그라 불리우는 예지능력자들은, 풀에 잠겨서,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살인의 풍경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 흥미 깊은 점은, 이 이미지는 즉 스너프 무비 -- 뒷사회에 유통되는 진짜 살인을 기록한 영화 필름 -- 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이미 몇 사람에 의해 행해지고 있단 사실이다. 그렇다, <미지와의 조우>에서 마더쉽이 "시네마"의 메타포였던 것처럼.

"9.11"의 문맥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많은 <우주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실로 악취미한 <미지와의 조우>의 뒤집기다. 과거에 우호적인 우주인을 그렸던 스필버그가, 여기서는 순수한 폭력 그 자체인 침략자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에 트뤼포가 올려다 보았듯, 이 영화에서도 또한 사람들은 땅 위에 나타난 트리아포드를 올려다 본다. "삼각". 이만큼 노골적인 영화 카메라의 메타포가 어디 있으랴. 이 영화에서 인간을 쓰레기처럼 말살하는 건, 그 모노아이가 발하는 광선이다. 이 영화에서 죽음의 이미지는 명확히 영화 카메라와 이어져 있다.



그렇다면, <A.I.>에서 죽은 자란 어디 있는 걸까. 그건, 주인공인 데이비드 그 자체다. 로봇인 데이비드는, 어떤 부부의 눈 뜰 수 없는 자식의 대체물로 소환된다. 그리고, 그 외견적인 모델은 설계자인 박사의 지금은 없는 아들이다. 즉, 데이비드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죽은 자였다. 우리가 죽은 자들에 대해 투영하는 여러 정념으로 구성된, 지역에 속하지 않는 일종의 역사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상공간으로 출현한 "사자의 제국". 데이비드는, 그 척후로 우리들 앞에 출현했다.

21세기에 들어서, 스필버그는 그때까지 막연히 그려온 "저 편"을, "사자의 제국"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우리들을 주박하고, 규정하고, 충동질하는 것으로. 이 세 편, 스필버그 SF에 일어나는 일이란, 영화의 이야기가 전부 죽은 자에 의해 견인되고 있다는 너무나 그로테스크한 사태다. "저 편"이란 "사자들의 나라"이며, "사자들의 나라"는 즉 "역사"라는 인식의 극한이 <뮌헨>이고, <A.I.> <마이너리티 리포트> <우주전쟁>은 <뮌헨>에 다다르기 위한 준비였다.

21세기, 스필버그는 "표현"의 세계에, 그 나름대로 방법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우주 전쟁>, <뮌헨>은 확실히 "9.11"이란 이야기하기 쉽고 소비되기 쉬운 문맥을 불러오는 영화였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마저도 "9.11" 뒤의 시큐리티나 환경관리형권력의 문제와 결합해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아마도 지금의 스필버그가 엿보는 창은, "9.11"을 그 안에 포섭해가면서도 보다 고전적이며, 본질적이며, 거기에 더해 차갑고 황폐해진 풍경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죽은 자에게 안식 있기를, 하고 바라는 이유는 뭘까.
그건 죽은 자가 이따금 안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필버그는 알고 있다 -- 죽은 자가 안식을 얻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으리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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