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언제라도 있다 ~ 커다란 이야기는 항상, 이미 죽어왔다.
이 글에서 촉발되서 여러가지 사고가 떠올랐기에,좀 적어보려 합니다.
「동서 냉전이 끝나고서 스파이 영화는 만들기 어려워졌다」
라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은 자주 있습니다. 소련, 혹은 공산주의라는 악역을 잃었으니까, 즉 커다란 이야기가 죽었으니까, 그 외에도 이것저것.
자, 예를 들어 007 시리즈를 봅시다. 007의 적은 공산주의였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스펙터이거나 부자이거나 부두교이거나, 그 바리에이션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소련 자체가 악역인 007 영화는 거의 없습니다.
분명히, 50년대에 스여진 원작소설은 소련이 "적"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케네디와 후르쇼프의 "해빙기"가 시작된 60년대에 제작되기 시작한 영화들은 소련이 악역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007의 주적은 비밀조직 "스펙터"이며, 이 스펙터가 무엇의 약자인고 하니 "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ition", 번역하자면 "대첩보활동 혹은 테러리즘 복수, 공갈을 위한 특별조직"이란 엄청난 이름입니다만, 이 조직, 각 담당의 판매양(금전적인)에 의해 담당의 생사가 결정되는, 궁극의 자본주의형 악역입니다.
"러시아에서 사랑을 담아"도 소련의 대 스파이기관 스메르슈가 적이었던 원작을 일부러 변형시켜, 스펙터를 메인 악역으로 놓았습니다. 소련이 악역이라 해도, "공존을 향하는 미국, 소련의 데캉트를 맘에 들어하지 않는 우파"와 같은, 일부 평화를 바라지 않는 급진파가 적으로 공산주의나 소련 자체가 적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본드 영화에는 애초에 예전부터 소련도 공산주의도 적이 아니었단 겁니다.
그러니까, "소련이란 적을 잃었다"라는 문장이 글러먹은 건, 60년대부터 소련을 공공연히 적으로 하는 자세는 글러먹었기 때문입니다. "냉전과 붕괴해서 적을 찾는 것이 힘들어졌다"라는 것도 같은 부류로, 그런 사람은 실제로 그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를 본 적도 없으면서, 일반적으로 그렇다니까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지금에는 "테러리스트" 이상의 간단한 악역이 있을까요. 오히려 "테러리스트"란 엄청나게 막연한 단어가, 구체성을 가진 "적"으로 스크린에 비치게 된 이 21세기에 있어서는, 냉전과 같은 "소련"이란 구체적인 이름은 커녕, 정치사상도 필요 없어져 적으로써 "대량생산된다"는 듯이 되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적의 추상도와 기호성이, 냉전시대에 비해 높아진 결과, 그것이 특정한 주의주장이나 국가를 가리키지 않더라도 좋게 되어, 결과로써 "고려"도 적어진 것입니다. 왜냐면, "테러리스트"로 끝나버리니까요. 적으로써 특정한 정치사상을 가리키지 않더라도 되는데요. 이슬람일 필요 없잖아요, "테러리스트"면. 그런 게 아무것도 없어도 성립해버리는 악역이, 지금 시대에는 있는 겁니다.
그리고, 테러리즘이란 우리들이 일상에 대해서 장소 가리지 않고 공격을 걸어오는 탈영역적인 "적"인 이상, 즉 동네의 카페의 타겟에게 폭탄을 걸어오는 적이 설득력을 가진 이 세상인 이상, 설령 아랍계 테러리스트가 적이라도, 무대가 유럽이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적"의 본거지는 세계 어디라도 좋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 아이덴티티>나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실의 스파이 영화는 유럽을 좋아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소련이 적이었던 시대라도, 소련에 실제로 잠입하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촬영할 수 없으니까 (혹은 어려우니까). 그게 중국이나 이슬람권으로 바꿔도, 같습니다. 적국이 어디에 있는가 관계 없는 시대에 어디에 잠입하든 의미가 없습니다.
애초에, "적"을 만들기 쉬운 시대도, 그렇게 없습니다. 혹시 당신, 냉전 이전의 시대의 스파이 소설이나 스파이 영화가 없다거나 만들기 어려웠다거나 할 작정인가요? 냉전전부터 스파이 영화는 있었고, 지금도 훌륭히 수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냉전"과 "공통인식으로 받아지는 적을 만들기 쉬움"은, 냉전 전도 냉전 중도 냉전 후도, 확실히 말해서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붉은 안경"의 코멘터리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이 오시이 작품에 경찰관 주인공이 높은 것에 대해 "냉전이 끝나서, 적이 만들기 어려워졌다. 경찰이라면 어쨌든 범죄자란 가상적이 있다"고 각본가인 이토 카즈노리 씨에게 묻자, 이토 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전혀 (냉전이 끝났는니 어쩌니 하는 것 관계없이) 아니다, 적 자체가 상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테러리스트가 되버리잖아요."
즉, 적의 생산은 별로 시대와 관계 없습니다.
그럼, 이 "냉전이 붕괴되어 적이 만들기 어려워졌다"란 "신화"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이상하게도 픽션의 창작자조차, 그렇게 "테러리스트"란 말로 간단히 적을 양산해 가면서, "냉전이 끝나서 적을 만들기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커다란 이야기가 해체되었다"라는 생각과 셋트로써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려주세요. "커다란 이야기"가 죽었던 게, 이번이 처음인가요(갑자기 크게 나왔다)? 아주 예전부터, 그야말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한 부터 계속, "커다란 이야기"란 "죽어 오지" 않았습니까? 언제나. 그거야말로 부단히 죽어오지 않았나요? 어떤 공동체가 바깥 세계를 알게 되거나 충돌하거나 할 때마다, 언제라도 공동체의 상부구조에 앉은 이야기는 죽거나 핀치에 빠지거나 했잖아요? 그걸 "미/소 이극화의 소멸"만이 "커다란 이야기의 죽음"이라니,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신화화해서 특권하하려는 노스탤지어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까? 후쿠야마라던지 혹은 포스트 모던 놈들이 말하기 시작한 거 아닌가요? 적어도, 픽션에서 있어서 "가상적"으로는, 냉전이 끝났어도 벌레에 물린 것보다도 못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픽션의 생산에 있어 "냉전종결로 하기 어려워졌다"란 신화가 말하게 된 데에는, 그 세계를 보는 사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므로, 그럼 그 신화와 바람은 어디서 나왔던 걸까요?
(쓰는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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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이토 케이카쿠는 이에 대해 블로그에 언급한 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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