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이 마모루,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회사를 다니나> 일부 인용

<피닉스>는 당신에게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영화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스스로 행복해지려면 타인에 대한 책임도 짊어져야 한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러한 인간관계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큰 착각이며 책임 회피에 불과하다.

'무언가로부터의 자유'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란 '무언가를 이룩하기위한 수단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 '자유' 그 자체로는 주제가 될 수 없다.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라면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허슬러>의 '실패자가 될 자유'와 다름없다. 자유가 도망치기 위한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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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 위험을 피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오늘날 일본에 만연한 안전 신화도 마찬가지다. 요즘 일본인은 오로지 '안전'이라는 주제에만 몰두하는 듯하다. 안전한지 혹은 안전하지 않은지가 유일한 가치판단 기준이다. 정치가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안전 여부에 관해서만 떠들어대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오스프리부터 원전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안전한가? 그 일로 인해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당신은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모두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만다. 지금까지 여러 추락 사고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비행기를 만들지 말자고는 하지 않는다. 매년 수천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지만 자동차를 없애자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위험 요소가 전혀 없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기술로도, 어떤 논리로도, 절대 안전 혹은 위험성 제로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위험성이 0.1퍼센트면 되는지, 0.001퍼센트면 되는지는 누가 정하는가? 모두들 하나같이 자기 말고 다른 누군가가 정해주기를 바란다. 오늘날 방사능 기준치도 마찬가지다. 세슘 연간 검출량이 이 정도면 안전하다고 말하지만 2년 후에나 3년 후에 암이 발병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이야기만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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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법이건 반드시 위험은 따르게 마련이다. 결단이란 하나씩 하나씩 위험 가능성을 배제해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 경영자 혹은 지도자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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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소 문제도 마찬가지다. 원전을 짓는 편이 좋았는지 짓지 않는 편이 좋았는지, 어느 쪽이든 왈가왈부 떠들어대지만 그런 사람은 어차피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영화의 조종사처럼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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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요인과 승패는 공존하므로 그 책임을 다했을 때는 성취감과 자유를 맛볼 수 있다. 그것이 싫다면 육체노동을 해서 비행기 날개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쪽을 선택할 자유, 다시 말하면 결단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도 가능하다. 그 대신 자신의 운명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다. 진정 자신만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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