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오시이 마모루, <새가 있는 풍경> ~ <이야기>를 아웃레인지하다.
한 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컷 안에서는, 스토리의 전개에 전혀 공헌하지 않는 컷이 필요합니다. 그뿐이랴, 더해서 말하자면 "이야기 그 자체를 소외하고, 이화하기 위한 의미불명한 컷이나 시퀀스나 설정"도 또한 필요합니다.
모든 컷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품으로 필요충분한 그 기능을 다하며, 또한 긴밀한 계산 아래서 늘어서있다면, 그건 연출가로서야 이상적인 필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해 기능한다면, 영화는 그저 <이야기의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론, 영화는 보여짐으로써 다양한 해석을 낳고 연출가의 기대를 뛰어넘음으로써 <영화>로써 체험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화>란 자유롭고 젊은 형식이 특필해야 할 장점이며, 그 가장 본질적인 부분까지 사거리에 넣어서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출의 한계는 그대로 연출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어떤 단순한 작품이라도 그런 류의 바꿔 읽기의 여지를 남기며, 양산함으로써 작품 구조가 순화되거나, 촬영 때의 우연, 배우와의 만남으로 <우연>이 개입되어, 액션 영화가 기묘하게 보편적인 세계관을 실현하는 듯한, 그런 행복한 순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한 편으로 애니메는 일반적으로 실사작품에 비교해서 정보량이 압도적으로 적고, (그렇기에 표현이나 구조를 컨트롤하기 쉽다는 메리트는 있습니다만) 그런 류의 <우연>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양산되는 TV시리즈에 비교해서, 말하자면 한판 승부인 영화작품의 경우, 특히 <우연>을 품기 어려우며, 이것이 아니메 작품이 같은 영화의 구조를 가지면서도 '어차피 만화'이며 '깊이가 얕다'란 인상을 남기는 원인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실사작품이 컷 그 자체가 갖는 정보량 (의도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여) 에 의해, 손쉽게 실현하고, 애니메 작품에서는 항상 결여되어 있는 것, 그것이 세계관의 기반이 되는 백 그라운드인 "세계의 깊이"입니다. 현실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영화의 현실(세계)에도 필요충분 이하의 요소, 불충분한 정보 = 노이즈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노이즈야말로 <의도한 것 외엔 그릴 수 없는> 애니메가 가장 어려워하는 묘사임은 분명합니다. 아니메 작품인 영상은 원리적으로 2차 영상 그 자체이며, 현실을 기계적으로 비추는 실사 영상에 비교해 처음부터 추상도가 높고, 명확한 의도와 방법 없이는 현실에 이어두기가 곤란한, <<기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정보량의 문제가 아닌 것은, 정보량 그 자체를 얼만큼 늘린다 해도, 그것이 의도된 정보에 지나지 않다는 한계가 명확하며, 작화된 영상은 어떻게해도<<노이즈>>를 발생시킬 수 없습니다.
아니메가, 아니메인 한계를 안으면서도, 세계의 깊이를 실현해 <영화>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뭘까?
그 실험이 [새가 있는 풍경]입니다. <패트레이버 2 the movie>에 그려진 새들은 어떤 추상적인 의미도 없습니다. 강하게 말한다면, 그건 이 작품에 그려진 "세계"와 "이야기"에 혼입된 노이즈며, 기호 체계를 흩뜨리는 이질적인 기호 그 자체 외에 그 무엇도 아닙니다. 본편의 외부에 있으며 이야기를 아웃레인지하여, 작품을 자율적으로 완결하려고 드는 연출가의 의도를 장거리로부터 사거리에 넣어, 사거리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는 불편한 장거리포.
그것이 바로 <<새>>입니다.
새를 여기저기 출몰시키는 작업이라면, 레이아웃이란 공정이 제격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모든 컷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품으로 필요충분한 그 기능을 다하며, 또한 긴밀한 계산 아래서 늘어서있다면, 그건 연출가로서야 이상적인 필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해 기능한다면, 영화는 그저 <이야기의 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론, 영화는 보여짐으로써 다양한 해석을 낳고 연출가의 기대를 뛰어넘음으로써 <영화>로써 체험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영화>란 자유롭고 젊은 형식이 특필해야 할 장점이며, 그 가장 본질적인 부분까지 사거리에 넣어서 생각한다면, 이러한 연출의 한계는 그대로 연출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어떤 단순한 작품이라도 그런 류의 바꿔 읽기의 여지를 남기며, 양산함으로써 작품 구조가 순화되거나, 촬영 때의 우연, 배우와의 만남으로 <우연>이 개입되어, 액션 영화가 기묘하게 보편적인 세계관을 실현하는 듯한, 그런 행복한 순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한 편으로 애니메는 일반적으로 실사작품에 비교해서 정보량이 압도적으로 적고, (그렇기에 표현이나 구조를 컨트롤하기 쉽다는 메리트는 있습니다만) 그런 류의 <우연>과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양산되는 TV시리즈에 비교해서, 말하자면 한판 승부인 영화작품의 경우, 특히 <우연>을 품기 어려우며, 이것이 아니메 작품이 같은 영화의 구조를 가지면서도 '어차피 만화'이며 '깊이가 얕다'란 인상을 남기는 원인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실사작품이 컷 그 자체가 갖는 정보량 (의도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여) 에 의해, 손쉽게 실현하고, 애니메 작품에서는 항상 결여되어 있는 것, 그것이 세계관의 기반이 되는 백 그라운드인 "세계의 깊이"입니다. 현실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영화의 현실(세계)에도 필요충분 이하의 요소, 불충분한 정보 = 노이즈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노이즈야말로 <의도한 것 외엔 그릴 수 없는> 애니메가 가장 어려워하는 묘사임은 분명합니다. 아니메 작품인 영상은 원리적으로 2차 영상 그 자체이며, 현실을 기계적으로 비추는 실사 영상에 비교해 처음부터 추상도가 높고, 명확한 의도와 방법 없이는 현실에 이어두기가 곤란한, <<기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정보량의 문제가 아닌 것은, 정보량 그 자체를 얼만큼 늘린다 해도, 그것이 의도된 정보에 지나지 않다는 한계가 명확하며, 작화된 영상은 어떻게해도<<노이즈>>를 발생시킬 수 없습니다.
아니메가, 아니메인 한계를 안으면서도, 세계의 깊이를 실현해 <영화>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뭘까?
그 실험이 [새가 있는 풍경]입니다. <패트레이버 2 the movie>에 그려진 새들은 어떤 추상적인 의미도 없습니다. 강하게 말한다면, 그건 이 작품에 그려진 "세계"와 "이야기"에 혼입된 노이즈며, 기호 체계를 흩뜨리는 이질적인 기호 그 자체 외에 그 무엇도 아닙니다. 본편의 외부에 있으며 이야기를 아웃레인지하여, 작품을 자율적으로 완결하려고 드는 연출가의 의도를 장거리로부터 사거리에 넣어, 사거리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는 불편한 장거리포.
그것이 바로 <<새>>입니다.
새를 여기저기 출몰시키는 작업이라면, 레이아웃이란 공정이 제격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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