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이야기
아주 예전부터 생각해 왔다. 왜 사람은 자식을 만드는 것일까.
귀여우니까, 라는 건 꽤나 낙천적인 사람의 대답이리라. 귀여운 시기따위는 일순간이다. 지금은 아빠를 닮았네, 엄마를 닮았네해도, 아기 특유의 누구를 닮았다고 해도 좋은 애매한 얼굴을 자신의 자존심이 만족하는 것처럼 해석해 기뻐하더라도, 그런 사랑스러운 애매한 시기는 금방 지나버리고, 금방 같이 팬티를 빨지 않겠다느니, 돈을 더 부쳐달라느니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
코스트 퍼포먼스적인 점을 말하자면, 자식을 만들어 키우는 일은 매우 투자가 많이 필요한 경영이랄 수밖에 없다. 물론 아이를 만드는 일은 코스트 퍼포먼스의 문제가 아니며, 더욱이 낳은 아이를 길러, 같이 살아가는 그 경영은 금전이나 효율로는 교환할 수 없다. 자신의 자식, 이란 것에 안는 감정은 특별하다. 아니, 특별하다기보다는, 특별한 것으로 의식하도록 뇌가 계속 유도를 걸어온다.
다만, 아이를 갖기는 커녕, 반려조차 갖지 못하는 몸으로서 냉정하게, 아이를 가짐으로써 얻게 될 베네핏과 코스트를 천칭에 달아볼 경우, 명확히 아이를 갖는 디메리트가 크고, 수익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갖는 혹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불공평한데다가 거기에 더해 일체의 코스트 의식을 무효한 뒤에야 성립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수준의 경제적인 여유에 도달한 나라는 소자녀화의 방향으로 향한다. <아이를 갖아봐야 이득이 안된다>는 일에 모두가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사정에 의해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을 수 없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한 사람에게 <코스트와 이익을 생각해보면, 아이따위 갖을 필요없어>라고 설득해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건 불보듯 빤하다.
그래도 많은 사람은 아이를 갖으려 한다.
사람은 어째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 물론, 사람은 죽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기 때문에, 죽어서 사라져버리니까 자기자신을 남기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남긴다는 건 대체 무슨 일일까. 아이의 육체에 깃든 유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건 기른 자의 기억. 같이 지내온 시간의 기억, 그리고 여러가지 성향과 행위, 버릇이다.
그건 이야기라고 말해도 좋다.
사람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아이를 기른다.
그보다도, 사람은 이야기로만 자식에게 자신을 남길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야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야기로 되어있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벤자민 리벳의 실험이란 게 있다. 사람이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할 때, 뇌나 육체에 발생하는 전위를 측정한 것이다. 사람이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결의한 순간. 그리고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위해, 뇌의 어느 부위가 움직이는 <준비>에 들어가는 순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움직이려고> 생각했으니 손가락이 움직이니까, 먼저 결의한 순간이 있고, 그 다음에 뇌가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준비에 들어갈 테다. 그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다. 벤자밋이 행한 실험에 의하면, 먼저 뇌에 손가락을 움직이고자 하는 준비단계가 발생하고, 그 뒤에 <손가락을 움직이고자>하는 결의가 발생한다.
우리가 손가락을 움직이고자 하는 <자유로운> 의지가 먼저 오지 않는다. 그건 육체가, 뇌가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행동을 일으키려고 한 뒤에 따라오는 착각, <자신이 그걸 행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뇌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준비에 들어가고서,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의지가 발생하기까지는, 0.35초의 차가 생긴다.
이 실험이 가리키는 것. 그건 뇌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 먼저> 신체를 움직이려고 결정하여, 그 뒤에 <나는 이제부터 손가락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는 듯이 <생각시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컴퓨터가 정보처리에 다양한 계산을 행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눈알이나 귀와 같은 정밀기관이 받아들인 방대한 외계의 정보를 뇌가 일순간에 처리한다고 생각하는 게 부자연스럽다.
정보처리에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해보면, 귀에서 들어오는 정보와, 눈에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피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 그것들이 전부 같은 타이밍에 맞추어 들어온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 인간의 뇌는 오감의 정보를 편집하여, 제대로 시간축에 맞추어 정리하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사후적으로 만들어낸다. 인간이 생각하는 "지금 현재"는 어디까지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이란 방대한 정보의 덩어리로부터 뇌가 잘라내어, 정형하여, 편집하여 출력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뇌에는 <현실> 그 자체는 부여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뇌가 생산해낸 픽션이다.
애시당초, 의식이란 <나>라는 말에서 떠오르듯이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진화>라는 말이 <앞으로 향하며 개선해 나아가는> 것이란 이미지로 오해하여 받아들여진 것과 비슷한 오해가 있다.
예를 들면, 당뇨병을 생각해보자. 당뇨병은 지금에서야말로 생명에 관련된 <병>이며, 처치해야할 무언가로 생각되고 있지만, 당뇨병은 입장을 바꾼다면 <병>이 아니다, 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뇨병이란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획득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설탕을 녹인 물을 생각해보자. 그 어는 점, 물이 얼음이 되기 위한 온도는 설탕이란 불순물이 섞였을 경우 제로 이하가 된다. 이건 한랭기를 맞딱뜨리게 된 인류에게 있어서 커다란 은혜를 가져다준 기능일 테다. 혈액중, 세포중의 수분에 당분이 포함되어 있으면, 인간의 육체는 추위에 더욱 견디기 좋게 된다. 설령 그 당분이 혈관이나 간장을 너덜너덜하게 만들더라도, 그게 치명적인 레벨에 도달할 때 까지는 몇십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아이를 낳음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돌봐주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까, 당뇨병이란 빙하기따위의 한랭기를 인류란 종이 거쳐나가기 위해 중요한 기능이었다는 것이다.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는 현재, 과거에는 인류라는 종을 이어간 기능일 그것이, 생명을 위협하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인류에게는 당뇨병따윈 필요없으리라. 그러나, 그건 인류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진화>한 결과 획득한 특질이기도 하다. 진화의 결과, 우리의 신체에는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이 깃들었다. 그것외에도 <병>이라고 생각되는 다양한 병들이, 그러한 귀중한 <기능>이었으리라.
지구의 환경은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 때 그 때 변화에 <대처>하기위해, 인류는 유전자에 새로운 기능을 짜올렸다. 그 때 그 때에 맞추어 돌연변이로 획득해온 기능이며 병이기도 한 특질. 그렇다, 우리의 신체는 <임시변통>의 덩어리다. 어떤 때에는 춥고, 어떤 때에는 더웠으리라. 내리는 자외선에 대응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사람들의 살색은 검다. 반대로 차가운 지역의 사람들의 살색은 적은 태양광을 체내에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하얗다. 인도인의 어떤 가족은 영국에 이사하고 나서, 거기서 아이의 이빨이 잘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은 피부가 태양광을 흡수해버려서 체내에 도달하지 못하고,합성에 태양광을 필요로 하는 물질이 합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는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기능의 패치워크인 셈이다. 그건, 우리들이 하나의 전체라고 착각하고 있는 혼도 마찬가지다.
즐거워 하는 일, 노여워 하는 일, 슬퍼 하는 일, 즐기는 일.
우리가 느끼는 감정 모든 게 <생존에 필요했으니까> 인류의 뇌에 <임시변통>으로 모인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빛을 느끼는 것, 물질의 윤곽을 판별하는 일, 색이란 퀄리아를 느끼는 일, 음을 듣는 일, 음들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만을 분리해서 듣는 일, 그러한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능 모든 것이, 태고의 여러가지 환경을 근거로 따로따로 태어난 기능이다. 인간은 필요에 응해서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뿔뿔이 흩어져, 조금씩 느끼는 듯이 진화해 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현실>이란, 뿔뿔이 흩어진 각각의 기능이 잡아낸 것을, 마치 <현실>이라는 하나의 세계이듯이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리얼한 시간으로부터 몇분의 일초가 늦어져 출력된 상이다.
<자신이 무엇을 의식하고서, 그 무언가를 한다>
전술한 실험으로보면, 어쩌면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생긴다. 의식이란 어디까지나 <뒤따라 붙는> 감각이며, 또한 뇌는 그게 <뒤따라 붙는> 일임을 의식할 수 없다. 거기다, 우리의 <의식>이 받아들인 <현실>은 몇 분의 일초의 처리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통합된 환상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의식이 결의하는> 일이 환상이라고 한다면, 의식의 역할은 무엇일까.
<의식수동가설>이란 게 있다. 음을 듣고, 무언가를 보고, 의식의 전 단계에서 판단을 하는, 그리고 근육을 움직여 무언가를 한다. 인간의 의식의 전에 그런 모든 것이 이뤄지고, 판단과 행동이 일어난 뒤에 <내가 그걸 하려고 결의했다>고 착각하는 것이 <의식>이다, 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육체나 뇌의 신경 네트워크가 일으키는 모든 현상의 가장 최후에,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역할로 기능하는 것이 의식이다, 라는 셈이 된다. 그것이 <수동>의 의미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서야, 의식은 <내가 결의해, 행동한다>고 뇌에 의해 착각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의식>이 필요한가.
그건 이야기를 짜올리기 위해서다.
갑자기 이렇게 말해도 그 무엇도 알기 어려우리라.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식은 <이벤트>를 <기억>으로써 정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뇌의 네트워크가 <누덕누덕>진 현실로부터 생성한 현실, 그리고 의식 아래가 결단하여 행동하는 모든 것, 그러한 것들을 하나로 연결된 이벤트, 바꾸어 말한다면 <이야기>로 편집하기 위해, 기술하기 위해 존재한다. 무의식이 행한 것을 <그러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계통이었던 일련의 이벤트로써 <인식>하고 <기억>하여 뇌의 도서관에 끝마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다,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혼이 존재하는 건, 이야기를 짜내기 위해서라고.
인간의 뇌는, 현실을 이야기로써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누구라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그건,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의 픽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혼은, 현실을 하나의 이야기로써 기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일단 이야기로써 기억된 현실은, 당사자의 삶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에도 파급되어, 영향을 미치어 간다. 어머니가 만드는 식탁의 맛조차도 하나의 이야기이며, 혀가 그 이야기를 받아들여 개인의 일부가 된다.
뇌라는 <픽션을 제조하여, 편집하는 기관>으로부터 혼이라 불리는 <상태>가 만들어진 이상, 사람은 그 자신이 픽션이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현실로부터 많은 정보를 깎아내고, 편집한 <픽션>이란 존재방식이기에 가능해지는 일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다양한 형태로 타자에게 전하는 일이다. 그건 <픽션>이란 편집되어, 기술된 콤팩트한 존재이기에 가능하다.
현실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이야기로써 처리하는 기능을 뇌로부터 부여받았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과거에 헤밍웨이가 그리 말했다. 헤밍웨이에게 있어서 무엇이 승패였는지, 과문한 나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로써 타자에게 깃들 수 있다. 사람은 이야기로써 누군가의 신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하게 이야기되는 일로, 다른 많은 인간을 형성하는 픽션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사람이 전하는 것은 유전자만이 아니다. 사람이 아이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가까운 타자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은 청자를, 가장 열심이고 충실한 청자를 원해서 아이를 만든다. <듣는>다는 건 물론 비유이며, 그 사람이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리라. <살아가는 모습>이란 픽션의 동의어이며, 부모가 아이에게 보여주는 살아가는 모습의 수만큼 픽션이 태어난다.
그리고 나는 작가로써, 지금 이렇게 적고 있듯 나 자신의 픽션을 말한다. 이 이야기가 당신의 기억에 남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가능성에 걸어보고자 이 문장을 쓴다.
이것이 나.
이것이 나라는 픽션.
나는 당신의 신체에 깃들고 싶다.
당신의 입에 의해서 더욱 타자에게 이야기되어 이어지고 싶다.
귀여우니까, 라는 건 꽤나 낙천적인 사람의 대답이리라. 귀여운 시기따위는 일순간이다. 지금은 아빠를 닮았네, 엄마를 닮았네해도, 아기 특유의 누구를 닮았다고 해도 좋은 애매한 얼굴을 자신의 자존심이 만족하는 것처럼 해석해 기뻐하더라도, 그런 사랑스러운 애매한 시기는 금방 지나버리고, 금방 같이 팬티를 빨지 않겠다느니, 돈을 더 부쳐달라느니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
코스트 퍼포먼스적인 점을 말하자면, 자식을 만들어 키우는 일은 매우 투자가 많이 필요한 경영이랄 수밖에 없다. 물론 아이를 만드는 일은 코스트 퍼포먼스의 문제가 아니며, 더욱이 낳은 아이를 길러, 같이 살아가는 그 경영은 금전이나 효율로는 교환할 수 없다. 자신의 자식, 이란 것에 안는 감정은 특별하다. 아니, 특별하다기보다는, 특별한 것으로 의식하도록 뇌가 계속 유도를 걸어온다.
다만, 아이를 갖기는 커녕, 반려조차 갖지 못하는 몸으로서 냉정하게, 아이를 가짐으로써 얻게 될 베네핏과 코스트를 천칭에 달아볼 경우, 명확히 아이를 갖는 디메리트가 크고, 수익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이를 갖는 혹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은, 불공평한데다가 거기에 더해 일체의 코스트 의식을 무효한 뒤에야 성립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수준의 경제적인 여유에 도달한 나라는 소자녀화의 방향으로 향한다. <아이를 갖아봐야 이득이 안된다>는 일에 모두가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사정에 의해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을 수 없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한 사람에게 <코스트와 이익을 생각해보면, 아이따위 갖을 필요없어>라고 설득해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건 불보듯 빤하다.
그래도 많은 사람은 아이를 갖으려 한다.
사람은 어째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 물론, 사람은 죽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기 때문에, 죽어서 사라져버리니까 자기자신을 남기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자신을 남긴다는 건 대체 무슨 일일까. 아이의 육체에 깃든 유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있는 건 기른 자의 기억. 같이 지내온 시간의 기억, 그리고 여러가지 성향과 행위, 버릇이다.
그건 이야기라고 말해도 좋다.
사람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아이를 기른다.
그보다도, 사람은 이야기로만 자식에게 자신을 남길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야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야기로 되어있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벤자민 리벳의 실험이란 게 있다. 사람이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할 때, 뇌나 육체에 발생하는 전위를 측정한 것이다. 사람이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결의한 순간. 그리고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위해, 뇌의 어느 부위가 움직이는 <준비>에 들어가는 순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움직이려고> 생각했으니 손가락이 움직이니까, 먼저 결의한 순간이 있고, 그 다음에 뇌가 손가락을 움직이려는 준비에 들어갈 테다. 그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그 반대를 가리키고 있다. 벤자밋이 행한 실험에 의하면, 먼저 뇌에 손가락을 움직이고자 하는 준비단계가 발생하고, 그 뒤에 <손가락을 움직이고자>하는 결의가 발생한다.
우리가 손가락을 움직이고자 하는 <자유로운> 의지가 먼저 오지 않는다. 그건 육체가, 뇌가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행동을 일으키려고 한 뒤에 따라오는 착각, <자신이 그걸 행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뇌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준비에 들어가고서,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의지가 발생하기까지는, 0.35초의 차가 생긴다.
이 실험이 가리키는 것. 그건 뇌가 <우리의 의지에 의해 먼저> 신체를 움직이려고 결정하여, 그 뒤에 <나는 이제부터 손가락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는 듯이 <생각시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컴퓨터가 정보처리에 다양한 계산을 행하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눈알이나 귀와 같은 정밀기관이 받아들인 방대한 외계의 정보를 뇌가 일순간에 처리한다고 생각하는 게 부자연스럽다.
정보처리에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해보면, 귀에서 들어오는 정보와, 눈에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피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 그것들이 전부 같은 타이밍에 맞추어 들어온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다. 인간의 뇌는 오감의 정보를 편집하여, 제대로 시간축에 맞추어 정리하는 것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사후적으로 만들어낸다. 인간이 생각하는 "지금 현재"는 어디까지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이란 방대한 정보의 덩어리로부터 뇌가 잘라내어, 정형하여, 편집하여 출력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뇌에는 <현실> 그 자체는 부여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디까지나 뇌가 생산해낸 픽션이다.
애시당초, 의식이란 <나>라는 말에서 떠오르듯이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진화>라는 말이 <앞으로 향하며 개선해 나아가는> 것이란 이미지로 오해하여 받아들여진 것과 비슷한 오해가 있다.
예를 들면, 당뇨병을 생각해보자. 당뇨병은 지금에서야말로 생명에 관련된 <병>이며, 처치해야할 무언가로 생각되고 있지만, 당뇨병은 입장을 바꾼다면 <병>이 아니다, 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왜냐하면, 당뇨병이란 <진화>의 과정에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 획득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설탕을 녹인 물을 생각해보자. 그 어는 점, 물이 얼음이 되기 위한 온도는 설탕이란 불순물이 섞였을 경우 제로 이하가 된다. 이건 한랭기를 맞딱뜨리게 된 인류에게 있어서 커다란 은혜를 가져다준 기능일 테다. 혈액중, 세포중의 수분에 당분이 포함되어 있으면, 인간의 육체는 추위에 더욱 견디기 좋게 된다. 설령 그 당분이 혈관이나 간장을 너덜너덜하게 만들더라도, 그게 치명적인 레벨에 도달할 때 까지는 몇십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아이를 낳음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돌봐주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까, 당뇨병이란 빙하기따위의 한랭기를 인류란 종이 거쳐나가기 위해 중요한 기능이었다는 것이다.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는 현재, 과거에는 인류라는 종을 이어간 기능일 그것이, 생명을 위협하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인류에게는 당뇨병따윈 필요없으리라. 그러나, 그건 인류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진화>한 결과 획득한 특질이기도 하다. 진화의 결과, 우리의 신체에는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이 깃들었다. 그것외에도 <병>이라고 생각되는 다양한 병들이, 그러한 귀중한 <기능>이었으리라.
지구의 환경은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 때 그 때 변화에 <대처>하기위해, 인류는 유전자에 새로운 기능을 짜올렸다. 그 때 그 때에 맞추어 돌연변이로 획득해온 기능이며 병이기도 한 특질. 그렇다, 우리의 신체는 <임시변통>의 덩어리다. 어떤 때에는 춥고, 어떤 때에는 더웠으리라. 내리는 자외선에 대응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사람들의 살색은 검다. 반대로 차가운 지역의 사람들의 살색은 적은 태양광을 체내에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하얗다. 인도인의 어떤 가족은 영국에 이사하고 나서, 거기서 아이의 이빨이 잘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은 피부가 태양광을 흡수해버려서 체내에 도달하지 못하고,합성에 태양광을 필요로 하는 물질이 합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는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기능의 패치워크인 셈이다. 그건, 우리들이 하나의 전체라고 착각하고 있는 혼도 마찬가지다.
즐거워 하는 일, 노여워 하는 일, 슬퍼 하는 일, 즐기는 일.
우리가 느끼는 감정 모든 게 <생존에 필요했으니까> 인류의 뇌에 <임시변통>으로 모인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빛을 느끼는 것, 물질의 윤곽을 판별하는 일, 색이란 퀄리아를 느끼는 일, 음을 듣는 일, 음들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만을 분리해서 듣는 일, 그러한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기능 모든 것이, 태고의 여러가지 환경을 근거로 따로따로 태어난 기능이다. 인간은 필요에 응해서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뿔뿔이 흩어져, 조금씩 느끼는 듯이 진화해 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현실>이란, 뿔뿔이 흩어진 각각의 기능이 잡아낸 것을, 마치 <현실>이라는 하나의 세계이듯이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리얼한 시간으로부터 몇분의 일초가 늦어져 출력된 상이다.
<자신이 무엇을 의식하고서, 그 무언가를 한다>
전술한 실험으로보면, 어쩌면 그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생긴다. 의식이란 어디까지나 <뒤따라 붙는> 감각이며, 또한 뇌는 그게 <뒤따라 붙는> 일임을 의식할 수 없다. 거기다, 우리의 <의식>이 받아들인 <현실>은 몇 분의 일초의 처리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통합된 환상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의식이 결의하는> 일이 환상이라고 한다면, 의식의 역할은 무엇일까.
<의식수동가설>이란 게 있다. 음을 듣고, 무언가를 보고, 의식의 전 단계에서 판단을 하는, 그리고 근육을 움직여 무언가를 한다. 인간의 의식의 전에 그런 모든 것이 이뤄지고, 판단과 행동이 일어난 뒤에 <내가 그걸 하려고 결의했다>고 착각하는 것이 <의식>이다, 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육체나 뇌의 신경 네트워크가 일으키는 모든 현상의 가장 최후에, 어디까지나 받아들이는 역할로 기능하는 것이 의식이다, 라는 셈이 된다. 그것이 <수동>의 의미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서야, 의식은 <내가 결의해, 행동한다>고 뇌에 의해 착각된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의식>이 필요한가.
그건 이야기를 짜올리기 위해서다.
갑자기 이렇게 말해도 그 무엇도 알기 어려우리라.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의식은 <이벤트>를 <기억>으로써 정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뇌의 네트워크가 <누덕누덕>진 현실로부터 생성한 현실, 그리고 의식 아래가 결단하여 행동하는 모든 것, 그러한 것들을 하나로 연결된 이벤트, 바꾸어 말한다면 <이야기>로 편집하기 위해, 기술하기 위해 존재한다. 무의식이 행한 것을 <그러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계통이었던 일련의 이벤트로써 <인식>하고 <기억>하여 뇌의 도서관에 끝마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다,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혼이 존재하는 건, 이야기를 짜내기 위해서라고.
인간의 뇌는, 현실을 이야기로써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누구라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다, 는 말이 있다.
그건,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의 픽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혼은, 현실을 하나의 이야기로써 기억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일단 이야기로써 기억된 현실은, 당사자의 삶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에도 파급되어, 영향을 미치어 간다. 어머니가 만드는 식탁의 맛조차도 하나의 이야기이며, 혀가 그 이야기를 받아들여 개인의 일부가 된다.
뇌라는 <픽션을 제조하여, 편집하는 기관>으로부터 혼이라 불리는 <상태>가 만들어진 이상, 사람은 그 자신이 픽션이라는 사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현실로부터 많은 정보를 깎아내고, 편집한 <픽션>이란 존재방식이기에 가능해지는 일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다양한 형태로 타자에게 전하는 일이다. 그건 <픽션>이란 편집되어, 기술된 콤팩트한 존재이기에 가능하다.
현실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이야기로써 처리하는 기능을 뇌로부터 부여받았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과거에 헤밍웨이가 그리 말했다. 헤밍웨이에게 있어서 무엇이 승패였는지, 과문한 나로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로써 타자에게 깃들 수 있다. 사람은 이야기로써 누군가의 신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하게 이야기되는 일로, 다른 많은 인간을 형성하는 픽션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사람이 전하는 것은 유전자만이 아니다. 사람이 아이를 만드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가까운 타자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은 청자를, 가장 열심이고 충실한 청자를 원해서 아이를 만든다. <듣는>다는 건 물론 비유이며, 그 사람이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법은 여러가지가 있으리라. <살아가는 모습>이란 픽션의 동의어이며, 부모가 아이에게 보여주는 살아가는 모습의 수만큼 픽션이 태어난다.
그리고 나는 작가로써, 지금 이렇게 적고 있듯 나 자신의 픽션을 말한다. 이 이야기가 당신의 기억에 남을지 어떨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가능성에 걸어보고자 이 문장을 쓴다.
이것이 나.
이것이 나라는 픽션.
나는 당신의 신체에 깃들고 싶다.
당신의 입에 의해서 더욱 타자에게 이야기되어 이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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