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자포] 어떤 아이(AI)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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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미사카 미코토는 눈을 떴다. 역한 쓰레기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쓰레기 더미들 사이에서 등이 받혀진 채, 미사카는 앉아있었다. 등으로 느껴지는 감촉으로, 미사카는 뒤에 있는 것이 쿠로코라는 사실을 알았다. 미사카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 시도는 곧 저지당했다. 그 어떤 구속구도  없었지만 미사카는 얼굴 근육 외에는 무엇 하나 제 의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멀리 도로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본격적인 쓰레기 처리장이라기보단 중간집하장인 듯 했다.

- 일어나셨나요, 언니?

  부드러운 음성이 미사카의 마음을 흔들었다. 고정된 시점 안에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어깨에 무기를 맨 소녀는 아지트에서와는 달리 비니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왼쪽 눈썹 끝에서 시작한 사선(斜線)이, 이마를 지나 오른쪽 머리 부분까지 갈라놓고 있었다. 긴 상처였다.

  미사카 미코토는,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된 사건을 떠올렸다.
  
01

  뒤를 돌아보자, 좀 나이가 들어 보이고, 머리숱이 걱정되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 신입이신가요.
- 예 그렇습니다만 ... 소셜 판타지요?
-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는 환상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건 퍼스널 리얼리티를 규정하는 규범입니다. 실은 퍼스널 리얼리티라는 말 그 자체가 사회적 환상에 불과해요.

  미사카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벙찐 얼굴을 하자, 남자는 자신이 좀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미사카를 향해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무능력자, 한 줄 띄고는 바쿠스라고만 쓰여 있었다. 

- 먼저 자기 소개부터 하죠. 저는 무능력자, 바쿠스라고 합니다.
- 아, 네. 어- 

  미사카 미코토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많아도 그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은 무수히 많다. 만약 진명을 함부로 꺼냈다가는 의심 받을지도 모른다고 미사카는 생각했다. 미사카는 적당히 생각나는 이름을 골라서 말했다.

- 우시로미야 엔제라고 합니다.
- 반갑습니다, 우시로미야 엔제씨.

  누가봐도 뻔한 가명이었지만, 그것은 바쿠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누이는 이해가 안되는지 턱을 긁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바쿠스 씨, 당신은 항상 무슨 소린지 모를 소리만 한다니까. 교사라 그런가?
- 이누이, 자네가 너무 생각없이 산다는 생각은 안해봤나?
- 교사!?

  미사카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주변 사람들이 미사카를 향해 돌아보자, 미사카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말을 자아내려고 했다.

- 아, 그 ... 교사와 레벨 4가 있는 스킬 아웃은 처음 들어서.
- 우리는 단순한 스킬아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신념으로 움직이죠. 헌데, 그걸 모르셨다면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는지.
- 나랑 아는 사이라 소개차 데리고 왔어.
- 자네가 토키와다이 아가씨랑 아는 사이라고?  

  흐음하고는 퀘스쳔 마크를 머리 위에 떠올리는 바쿠스. 미사카와 이누이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 친합니다, 아아, 그렇죠 아주 친한 친구 사이죠라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바쿠스는 그저 제 나름들의 사정이 있겠거니 했는지 두어번 주억이고는 말을 이었다.

- 이렇게 서서 말하는 것도 뭐하니, 어디 앉도록 하지.
  앉자마자 미사카 미코토는 질문했다.

- 소셜 판타지란 게 대체 무슨 뜻이죠?

  남자는 한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질문을 시작했다.

- 엔제 씨, 당신은 어째서 초능력을 개발합니까?
- 그건 당연히, 
- 당연히?
- 그러니까 그건
- 부모님이 기대하니까. 학교가 요구하니까, 사회에서 나가서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미코토는 자신이 여태까지 왜 그렇게 능력개발에 힘을 써왔는지,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바쿠스의 말에 뭔가 대꾸를 하고 싶었다. 바쿠스의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미코토는 당장, 반박할 말은 떠올리지 못했다.

- 제가 갖고 있지 못한 당신들의 능력이란, 퍼스널 리얼리티(Personal Reality ; 자기만의 현실)의 개발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하지만 그 자기만의 현실이란 건 타인들이 인정해줄 때에야 비로서 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인이 그러한 힘을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 이누이처럼. 자신의 몸을 단련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고, 타인과의 싸움을 통해 스릴을 맛본다 - 저로서는 가슴으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머리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능력자가 있는데 그런 구식의 ‘능력’을, 자신의 ‘퍼스널 리얼리티’를 꺼내보아야 그것은 받아 들여지지도 키워지지도 않습니다.

  이누이는 마치 제가 그 말을 했다는 듯 두 팔짱을 끼고 거만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쿠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었다.

- 지금 저 친구처럼 사람들은 그걸 자신이 생각해냈다고 주장하겠습니다만,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사회적으로 학습했을 뿐이죠. 마치 당신들이 학교에서 커리큘럼에 따라, 부족하면 다양한 약물을 투여해서 여러분들의 능력을 개발하고 여러분을 훈련시키지만 - 여러분들은 그게 자신의 현실처럼 생각하듯이.

  이누이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 그게, 소셜 판타지.

  미사카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쿠스는 똑똑한 학생을 칭찬하듯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 네, 그리고 그것이, 우리들의 규범이고 시스템입니다. 능력개발을 해라, 만이 규범인 것은 아닙니다. 타인에게 친절하거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 고난으로 부터 도망치지 말고 노력해라. 돈을 벌어라. 남들보다 좋은 물건을 사라. 왜, 라고 생각하면 결국 모두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미사카는 고개를 저었다. 

- 그것이 우리의 사회를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중요치 않은 집단이 오래갈 순 없습니다. 빼앗고 사기치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모여 사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두가 자급자족해서 돈을 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굳이 회사에서 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경계 안에서만 퍼스널 리얼리티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 바깥에 있는 퍼스널 리얼리티는 무시되거나 제거되죠.
- 이누이 씨처럼.
-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바로 그 소셜 판타지로부터 말살당하지 않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어가고 나가는 것도 자유롭게 계약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곳은 새로운 소셜 판타지를 창출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추방된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 말했잖아. 이 놈들은 의리같은 거 신경쓰지 않는다고.  

 이누이가 덧붙이자, 바쿠스의 얼굴이 조금 불쾌하게 변했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미사카가 물었다.

- 그런 소셜 판타지에 저항하기도, 하고요?
- 필요하다면. 그래서 이누이 군같은 전투 계약원이 있는 거고. 이누이 군이 얘기 안 하던가?

  미사카 미코토의 교복 밑으로 소름이 돋았다. 이건 잘 조직된 무장집단 그 이상이다. 확신범, 테러리스트들이다. 이들은, 학원도시로부터 추방당한 자들. 필요로 하다면 학원도시에 저항하는 자들. 그리고 이런 테러리스트들 가운데 이 정도로 사상을 설파할 수 있다면 꽤나 고위층에 틀림없다. 미사카 미코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 그래서, 나노머신까지 필요한 겁니까?
- ... 평범한 신참은 아닌가 보군.

  바쿠스가 연극적인 포즈를 취하며 말하고는, 곧 일어서서 주변에 뭐라 소리치려 하자 이누이가 남자를 붙들었다. 텃밭에서 시선이 미사카에게로 모여들었다. 미사카 미코토는 재빨리 변명을 생각해 내 덧붙였다.

- 실은 제 친구가 어떤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 뭐가 어떻게 잘못될 지 몰라서 등교거부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래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서, 이누이 씨에게 부탁한 겁니다. 제 친구가 어떻게 될 지 알고 싶어서.

  바쿠스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사랑과 우정 넘치는 토키와다이의 아가씨답군.

  어느새 바쿠스의 말투에 경어가 사라져 있었다. 미사카는 호랑이 굴에 들어와,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렸다. 만약 호랑이가 미사카의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다시 호랑이 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도대체 그 주사가 나노머신인 건 어떻게 알았 ... 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이누이, 이곳이 아무리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다지만 계약은 계약일세. 우리는 얼마든지 자네가 조건을 어기면 계약을 끊을 수도 있어. 그리고, 여기에 다신 얼씬도 못하게 해줄 수도.
- 저같은 전투 계약원을 잃는 건 SF도 뼈아플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제가 저 꼬마 숙녀한테 제공한 건 이곳까지의 루트. 이곳에 계약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 일에 대해선 말한 적 없수다. 

  바쿠스는 트집 잡을 수 없단 듯, 그러나 골칫덩어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듯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꾹꾹 눌렀다. 미사카는 혼자서, 누가 꼬마야 하고 투덜거렸다. 바쿠스는 한참 동안 그 자세로 멈추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 생각에 빠진 것처럼.

- 어이, 바쿠스 씨.

  이누이가 부르자 그제야 바쿠스는 고개를 들었다.

- 우시로미야 엔제 씨.  

  바쿠스가 미사카의 가명을 호명하자 미카사는 바쿠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치마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허튼 수작을 하려고 든다면, 바로 -

- 그 친구는 해방될 걸세. 소셜 판타지로부터. 그 나노머신이 그렇게 해줄 거야.

  너무나도 맥락 없는 말에, 미사카가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지만 바쿠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를 쳐다보았다. 그 때, MGS를 통해 쿠로코의 말이 들려왔다.

= 언니, 바깥에서 누가 그리로 들어가요. 남자 셋. 아니, 남자 둘에 비니를 쓴 여자가 하나.

  알았다는 뜻으로 미사카가 MGS를 두 번 톡톡 쳤다. 딱히 주의를 요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어느 정도의 인원이 이 건물에 있는지 알아 둘 필요는 있다. 또, 그런 일을 위해서 쿠로코를 일부러 다른 건물에 배치해 둔 것이고. 그런데, 무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얼래. 이 쪽을 보는 건가요? ... 웃었어요?

  쿠로코의 얼빠진 소리와 침묵. 그리고

= 언니, 도망쳐요!  

  비명. MGS에서 퍽, 하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바쿠스가 미사카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바쿠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한 미사카였지만, 동전을 잡고 일어나려는 그 때 - 건물에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건물 안의 사람들이 놀라서 위를 쳐다보자 다시 한 번 쿵, 하는 음이 났다. 곧, 거친 소리와 함께 유리와 어떤 물건이 미사카 위로 떨어졌다. 미사카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얼굴만 손으로 감싸쥐었을 뿐이다. 

  충격.

  미사카는 그것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자신의 위를 덮친 물건은 그리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약간 물컹거리기까지 했다. 그것은 - 쿠로코였다. 쿠로코, 하면서 놀라기도 전에, 바로 그 깨어진 유리 사이로 누군가가 내려왔다. 그 인물은 쿠로코 위에 착지했고, 미사카는 2차 충격에 숨이 막히며 몸을 떨었다. 동시에 영문 모를 두통이 미사카를 덮쳤다. 강렬한 두통에 미사카는 몸을 구부리며 바닥에 머리를 짓이겼다. 눈물이 나오고, 입술이 일그러졌다. 거친 숨이 목에서 헐떡였고, 머리가 다 뜯겨져 나가는 듯 미세한 수많은 침들이 머리를 찌르는 듯도 했다.

- 두더쥐가.

  여자의 말과 함께 미사카의 MGS가 전기가 합선될 때 특유의 퍽 소리를 냈다. 매캐한 타는 냄새가 건물에 퍼졌다. 미사카의 손에서 힘이 풀리며, 동전이 바닥을 굴렀다. 비니를 쓴 여자가 인간 둔덕에서 내려와, 동전을 잡았다. 미사카보다도 훨씬 어려보이는 소녀는 바쿠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 아주 잘했어요, 바쿠스. 잘 잡아두었어요.
- 별 말씀을.
- 이게 무슨 짓이야.

  이누이가 나서자, 소녀는 매섭게 이누이를 노려보았다.

- 이 여자는 우리 뒤를 캐고 다녔어요. 그런데 당신은 이곳에 이 여자를 들여 놓았죠. ‘전투 계약원은 SF에 위해가 가리란 사실을 인지하고도 이를 방임하거나 조장할 경우, 그 즉시 계약이 해지된다.’ 그 책임은 져야 할 거에요.

  소녀의 말에 이누이가 움찔하고 몸을 멈췄다. 소녀는 관심을 잃은 듯, 다시 눈을 돌려 미사카에게 신경을 옮겼다. 소녀는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이상해, 이상하단 말이야, 어디선가 ...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여자가 미사카 앞에 쭈그려 앉고는, 두통으로 발버둥치는 미사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렸다. 여자의 갈색 눈과 미사카의 갈색 눈이 마주쳤다.

- 아하. 이제 말이 되네.

  미사카는 고통 속에서 자신이 환각을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비니를 하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바로 미사카의 얼굴을 거울에 비춘 듯했다. 일그러진 미사카를 보며 거울이 빙그레 웃었다.

- 오랜만이에요, 언니.

  미사카는 정신을 잃었다.


02

- 넌 …
- 그래요, 소개가 늦었죠. ‘아이’라고 해요. 에이, 아이. 아이(AI).

  자신과 같은 음성, 자신을 축소한 듯한 클론(Clone ; 모방품). 미사카는 이 아이들을 알고 있었다. 통칭 시스터즈. 자신의 골수로부터 뽑아내 만들어진 이브들. 하지만 미사카 미코토는 이 아이를 알지 못했다. 미사카 미코토가 알던 아이들은

- 이런 말투를 쓰지 않아. 내가 알던 아이들은 이런 표정을 지을 줄 몰라. 내가 알던 아이들에겐 … 이름이 없어. 맞아요. 그랬어요. 

  미사카가 말을 잃었다. 아이는 미사카가 생각하고 있던 말들을 빼앗아 먼저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사카에게 다가왔다. 아이의 차가운 손이 미사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앞머리를 정리해주고, 옆머리를 넘겨주고. 옷의 먼지를 털어주고.

- 마치 인형이 된 기분이군요, 그렇죠?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이 미사카의 목을 졸랐다. 아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가 장난감을 분해할 때 아이는 장난감의 안위를 걱정하지도 않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미사카의 얼굴이 산소 부족으로 하얗게 질리고 나서야 아이가 손을 뗐다. 붉은 손자국이 미사카의 목에 밧줄처럼 감겼다.

- 나도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버린 거에요. 말투도. 표정도. 이름도. 내가 되고 싶으니까.
-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말했잖아요. 버렸다고.

  아이는 마치 새 옷을 산 여자처럼 미사카 앞에서 핑그르르 돌아보였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는 기분. 미사카는 아이가 육성으로 말하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미사카의 생각이 그대로 아이의 마음에, 아이의 생각이 그대로 미사카의 마음에 와서 울렸다.

  어째서 다른 사람을 말려들게 했어. 말려들었다니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인류가 동굴에 들어가고 불을 피웠을 적부터 있던 일인 걸요. 협동. 물물교환. 아웃소싱. 지금까지 늘 그랬던 일들의 연속에 불과해요.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능력을 밖으로 내주었어요. 

  자, 나는 열매를 채집할 테니 너는 나가서 사냥을 해오렴. 자, 나는 모를 심을 테니 너는 보초를 서. 아, 그리고 너는 뼈와 고기를 발라주고. 그렇기에 언니가 크레이프를 먹기 위해 경작할 필요도, 채집할 필요도, 심지어 요리할 필요조차 없어요. 밀가루는 호주에서, 잼은 캐나다에서, 설탕은 브라질의 사탕 수수밭에서. 만드는 기구는 광산과 제철소와 철물점에서. 운송업자와 도매점의 손을 거쳐,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를 써서 학원도시로. 그 모든 것은 인터넷의 정보 관리 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지죠. 언니가 무얼 먹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언니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 프로그램이 추천하는 오늘의 가게에 찾아가, 카드를 센서에 닿기만 하면, 짜잔. 맛있는 크레이프가 언니 손에.

   하지만 브라질의 사탕 수수밭에서 아이들이 14시간 노동에 착취당한다고 해도 언니는 휘말리지 않아요. 운송업자들이 설탕을 운반하면서 동시에 몰래 마약을 운반해 이익을 얻어도 언니는 휘말리지 않아요. 그 모든 과정에 쓰인 화석연료가 대기를 오염시켜도 언니는 휘말리지 않아요. 정보 관리 체계가 개인 정보를 침해해도 언니는 휘말리지 않아요. 법으로 처벌받지도 않고, 비난받지도 않고, 언니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아요. 언니가 그런 학원도시의 부를 쌓아주고 학원도시 데이터 베이스에 구매 이력 정보를 제공한다 해도. 내가 한 일도 그런 일이에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아요. 비난받지 않아요.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요.

  미사카의 침묵에 받아쓰기를 백 점 맞아온 딸아이를 칭찬하는 엄마처럼, 아이는 미사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사카는 축 늘어진 몸에 힘을 주려 애쓰며 아이를 향해 반박했다. 하지만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목적으로 사람의 윤리를 판단해. 너희는 능력자들을 사냥하기 위해 사람들을 운송수단으로 썼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단 건가요? 그럼 저의 목적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걸요. 뭐 ... ?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인류는 자신의 낡은 습성을 버릴 때가 되었어요. 자신의 환상을 버릴 때가.

  거기서 아이의 말은 멋대로 끊겨버렸다. 아이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의식을 미사키로부터 차단했다. 미사키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이를 보았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사고일까. 끊이지 않는 두통 속에서 미사카의 끊긴 생각들이 떠돌았다. 자신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가 마음에서 울렸다면, 실은 자신이 알던 사실을 반추해본 것에 지나지 않을까. 실은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멋대로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생각을 전개해나간 것은 아닐까. 

- 인형이 되는 일은 싫어요, 그렇죠? 

  그녀의 마음을 읽듯, 아이가 중얼거렸다.

- 너무 늦었어요. 언니가 무얼 하든, 조금 늦춰질 뿐, 멈출 순 없어요. 하지만 방해가 되게 둘 순 없으니 다리를 잡아둘 수밖에.
- 하 ... 필이면 이런 곳에 묶어 ... 둘 셈? 농담도 ... 적당히 해.
- 농담이라. 만약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면 언니한테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 뭐 … ?
- 아마, 이 농담은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인간을 향하는 거에요. 이것이 인간. 이것이 도시.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도시는 쓰레기를 남겨요. 게다가

  아이가 씩 웃었다. 그리곤 미사카의 오른 다리를 천천히 벌렸다. 그리고 아이는 그 작은 손 안에 정강이를 잡고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 난 말 그대로 다리를 잡아둘 생각이거든요.

  토이박스가 미사카의 다리를 찍어내렸다. 미사카는 -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고 그 지긋지긋한 두통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몇 번의 가격 끝에 미사카의 다리가 평소라면 절대로 굽지 않을 방향으로 휘었다. 미사카가 경악 속에서 자신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 이 다리론 못 쫓아오겠죠, 미사카 언니?

  아이가 환한 웃음을 짓더니, 토이박스를 들고 일어섰다. 미사카에게 그 어떤 반론의 순간도 주지 않고, 아이는 등을 돌려 미사카로부터 멀어져 갔다. 순간, 빛이 반짝이더니 - 총성과 함께 저격용 총알이 날아와 - 아이의 눈앞에서 튕겨나갔다. 아이는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아이는 주은 동전을 빼내어 들고 하늘을 향해 튕겼다. 미사카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미사카의 전매특허, 레일건이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미사카는 차라리 정신을 잃기 바라며, 두통 속에서 신음했다. 아이가 눈 앞에서 사라지고서야, 멀리서 '충격과 공포다 거지 깽깽이들아'라는 사텐의 목소리와 함께 쓰레기 장에는 연막탄이 퍼졌다. 미사카는 아이가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 너무 늦었어.

03

- 끝났습니다.

  '수술중'을 나타내던 빛이 꺼졌다. 녹색옷을 입은 남자는 마스크를 벗으며 그렇게 말하자, 두 손을 꽉 쥔 채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던 쿠로코가, 언니는요, 하고 비명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곁에 있던 사텐과 우이하루의 시선도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듯, 손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쿠로코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설마, 하고 운을 떼려던 찰라.

- 나 여깄어.

  수술실에서 미사카 미코토가 절뚝절뚝 걸어나왔다. 쿠로코는 달려가 안으려다가, 앤 셰퍼드의 저지에 의해 주춤 물러섰다. 미사카의 다리에 박혀있는 철제 교정기가 아침햇살을 받아 빛났다.

- 환자의 이상 부위는 총 세곳입니다. 하나는 다리. 복합골절이기에 본래라면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치료를 받아야하고 무리한 운동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미코토 일행이 병실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조금 뒤, 의사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왔다. 사텐만이, 음료수를 사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미코토의 보호자라고 이름 댄 앤 셰퍼드에게, 의사는 미사카의 상태를 보고 했다. 좀 떨어져 앉아있는 우이하루 카자리와, 울며 매달리는 쿠로코의 등을 두드리는 미코토 역시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귀를 기울였다.

- 본래라면.
- 네. 그것은 따로 말씀드려야겠군요. 일단 또 다른 부위는 목. 여기엔 주사기로 찔린 흔적이 있습니다. 체내에 뭐가 흡입되었는가... 에 대해서도 일단은 지금 당장 말하기엔 뭐하군요. 무언가를 주사했음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세번째 부위에 이상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부위는 ...

  미코토는 쿠로코의 머리카락을 귀로 넘기어 살짝 들어보았다. 쿠로코도 마찬가지로 주사와 같은 것을 맞은 흔적이 있었다.

- ... 뇌를 포함한 신경계 전체입니다. 미사카 미코토 학생은 현재 통각에 전혀 반응을 하지 않으며 일종의 각성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취를 해도 금방 다시 각성하며, 촉각은 있으나 통각을 호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을 행했습니다.
- 괜찮아요. 안 아프니까.

  미사카 미코토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 의사가 수술이 끝나고 고개를 저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학원도시의 환자들의 상태와, 의료기술은 바깥의 상식이 통하지 않기로 유명하지만, 그 학원도시의 의사도 이번 케이스에 황당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말씀드렸다시피 본래라면 복합골절의 경우 치유기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미코토 양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아마도 체내에 주입된 그것이 뼈들의 결합을 촉진시키고 있는 듯 합니다.
- '그것'이라면 ...
- 나노머신이겠죠.

  우이하루가 앤 셰퍼드를 쳐다본 채 말했다. 앤 셰퍼드는 우이하루를 내려다보았다. 두 여자의 갑작스러운 눈싸움에 의사는, 멍청히 멈추어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앤 셰퍼드가 턱을 들어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 에, 네. 자세한 것은 혈액 체취 검사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습니다만, 저희도 어떤 종류의 나노머신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한 결과도 밝혀야하고, 계속해서 교정도 이뤄져야 하므로 당분간은 미사카 미코토 양은 입원치료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 그렇군요.
- 나노머신이 작동하고 있으므로 어떤 약이 통할지 아닐지도 알 수 없고, 통증을 통해 증상을 알 수도 없으니 지금 당장은 어떻게 주의를 드리기 어렵군요. 저희 쪽에서 계속해서 회진을 돌고, 간병하시는 분이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해주셔야 할 듯합니다.

  미사카는 자신의 목을 쓱 쓸어보았다. 마치 흡혈귀가 물고 간 자리처럼, 동그랗게 남은 상흔이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맥동하는 혈류 사이로, 아주아주 작은 기계가 자신의 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미사카는, 그것이 느껴졌다.

- 알겠습니다.
- 그럼 ...
- 잠시만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이하루가 의사를 향해 말했다.

- 잠시만 저희끼리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우이하루의 굳은 표정에, 의사는 이 보호자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 예, 그럼, 문제가 있으면 너스콜을 눌러주십시오.

  의사가 몸을 돌려 병실밖으로 나갔다. 정중하게,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우이하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 셰퍼드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 저의 불찰로 여러분을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작전 중에 미사카 미코토 양의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 SN-프루프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한 점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 아뇨.

  우이하루가 고개를 저었다.

- 전혀 아니에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당신들은. 아니 이렇게 만들려고 우리를 부른 거죠.

  쿠로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창 밖에서 새 한 마리가 병실 근처에 자리를 틀었다. 마치 창 안의 상황이 궁금하다는 듯, 새는 쫑쫑 거리다가 다시 다른 곳을 향해 지저귀었다. 잠시 뒤, 쿠로코가 목이 매인 소리로 우이하루를 향해 물었다.

- 그게, 무슨, 얘기죠, 우이하루?
- ... 어디까지 알고 한 거지?

  이번에는 미사카가 매섭게 앤 셰퍼드를 향해 물었다. 앤 셰퍼드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앤 셰퍼드 등 뒤에서, 문이 거칠게 열렸다.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토키와다이 여중생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 사텐씨도 왔나 보군요. 이야기를 ...
- 저, 병실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만.

  쿠로코가 앤 셰퍼드 뒤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나, 상대인 비닐봉지를 든, 반팔 상의를 입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앤 셰퍼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 저기,

  이번에는 우이하루가 말을 걸려고 할 때, 미사카 미코토는 '느꼈다.'
  이 남자는 자신과 같다.

- 도망쳐!

  남자가 비닐봉지에서 물건을 꺼내어 들었다. 표정 없는 눈이, 가늠쇠 너머의 셰퍼드를 바라보았다. 셰퍼드의 눈에는, 남자의 팔 위로 조그마한 상흔이 들어왔다.

  병원에,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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