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the Nothing, With Love(5)



 「 어머, 또 만났군요

  한 순간, 폐하께서 말씀을 걸어온 줄 알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고 돌아보니 거기엔 폐하와 같은 동년배로 보이는 노부인이 한 명, 상복에 몸을 감싼 채 서있었다. 

 「 실례지만, 어디서 만났는지요
 「여기에요, 당신, 저번 달에도 이 묘지에 왔었잖아요. 남편의 묘가 두 자리 건너에요. 봐요

  그리 말한  부인은 묘비를 가리킨다. 다른 묘비와 같이, 별 다를 것 없는 묘비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행복한 인간은 묘비가 된다. 그 아래에서 심판의 날까지 대기하며 말라가는 육체를 누인 채, 묘비로써 지상에 표출된다. 행복한 자라면, 그 노파처럼 사랑하는 인간이 찾아와 두마디 세마디 말을 나누리라.

  아쉽게도, 내가 묘비가 될 확률은, 지금으로썬 한없이 적다. 먼저 직업상 베드에서 죽을 리 없고, 그뿐이랴 조국에서 죽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사체가 발견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병사처럼 인식표가 회수될 일도 없으리라.

  애초에 나는 이렇게 전사되어, 당연히 있어야 할 죽음을 몇 번이고 먼저 보내기를 계속하고 있다. 분명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대영제국이 나를 연옥으로부터 소환하면, 전사되어 '나'가 타자의 육체를 얻어 지상에 표출된다.
  
  그 때, 문뜩 생각했다. 나는 이미 묘비인지 모른다고. 묘비로써 서서, 묘비로써 말하고, 묘비로써 죽인다.

 「영감을 잃은지는 꽤나 지났지만, 너무 길게 같이 지내왔나 보오. 그 사람이 살던 리듬이, 그 사람의 버릇이, 나의 생활생활마다 깊이 자리잡고 있어요

  노파가 그리 말하고는, 서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사랑이라고 이전에 불리었다. 최초에는 확실히 사랑이었다. 그게 해마다 변질되어가고, 이전에 성적인 감정이나 정렬이나 고독을 낫게 해주기 바라는 미칠듯한 욕구는 점점 잃어가고, 생활의 리듬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알고리듬으로 변해간다. 사랑이 최후에 도달하는 곳, 사랑의 극한은, 사랑의 흔적을 자신의 생활에 새기는 일. 사랑하는 자의 패턴을 서로가 자신의 인생에 반복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당신 안에

  노파는 끄덕이고는, 방긋 웃었다. 쓸쓸함은 한 조각도 없는 그런 평범한 -- 아름다울 정도로 아주 평범한 -- 웃음이었다.

 「그 사람의 몸은 한 발 먼저 가버렸지만, 그 사람의 생활은 아직 내 안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인과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부탁하기 위해 온 거에요, 여기에. 매달 첫 일요일에 교회에 간 뒤에 와서, 나를 홀몸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좀 더 나를 해방해줘도 좋지않은가 하면서

  나와 비슷하다. 원전의 생활을 새기어 나는 살아간다. 그녀가 남편의 인생을 새기듯이, 그리고, 생전의  남편이 그녀의 인생을 새겼듯이.

  지금이 되어서야 깨달았지만, 여기에 자고 있는 친구, 지금까지의 나의 상사, 그리고 여왕폐하는 눈 앞에 있는 내가 과거의 나의 묘비로 보였던 걸까. 묘비로써 접하고, 묘비로써 명령을 내리고, 묘비로써 향하고 푸념을 한다. 살아있는 묘비. 과거에 이 남자가 분명히 지상에 존재해 역사의 표면에 나간 적은 없지만, 위대한 일을 해왔다는 증거.

  거기서 갑자기 무언가 걸렸다. 매달 첫 일요일.

 「저번 달, 나는 여기에서 당신과 만났습니까
 「네. 누구일런지요, 이 묘지의 주인은. 그 때도 당신은, 이 분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나는 저번 달 이곳에 오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지금은 이렇게 말해야 하나. 온 기억이 없다고.

  내가 아닌 내가, 친구의 묘를 방문했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 와있듯이.

 「그럼, 전에 당신과 만났다는 건 ...
 「네, 그러니까 저번 달 일요일

  닥터 아크로이드가 고속도로에서 떨어진 날. 

  아마도 내가 아닌 내가, 닥터의 입으로부터 진실을 전해들은 날의 다음날이다.

  지금의 나와 같이.



  집에 돌아오자, 소포가 와있었다. 

  묘지로부터 집에 돌아 올 때까지, 나는 계속 생각했다-- 자신은 닥터 아크로이드를, '칠드런(아이들)'를 죽였나하고. 그게 가장 합리적인 결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크로이드 저택에 발을 들이 밀었을 때, 아니, 팡본의 부지에 들어갔을 때 느낀, 그 감각. 어떻게 해서 잠입해, 어떤 사각을 파고들어 어떻게 아크로이드의 서재까지 도달할까.

  그 때, 나의 머리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오고 간 시뮬레이션은, 실은 시뮬레이션이 전혀 아니었다. 자신이 이미 한 일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저, 스파이로써 훈련이나 경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팡본에 있을 때 생각했지만, 그건 자기기만과 같은 류이리라. 뇌는, 뇌 안에 일어난 정합성으로 맞춰지지 않는 현상을 멋대로 이야기를 설명하려 한다고. 좌뇌와 우뇌가 분리된 남자의 각각의 뇌에, 다른 사진을 보여주는 실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뇌가 지각하는 왼쪽눈에는 눈이 덮인 집 사진을, 좌뇌가 지각하는 오른쪽 눈에는 오리의 다리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 각각의 사진에 대응하는 일러스트를 고르라고 하면, 우뇌 측인 왼손은 눈 치우는 삽을, 좌뇌 측인 오른손은 오리를 고른다.

  좌우의 손이 다른 반응을 보인 것-- 그것 자체가 예측된 결과랄 수 있다. 분리된 좌우의 뇌는, 서로가 무엇을 보았는가 알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놀라운 건 그 다음 반응이다. 삽을 골랐을 때, 오리의 새장을 청소하기 위해서다-- 변명도 거짓말도 아닌, 피험자는 자신의 의식이 그러했다고 마음 깊숙이 믿어서 그리 설명했다.  좌우의 손이 각각 다른 일러스트를 고른 사실을 안 좌뇌는, 순식간에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를 비틀어 끄집어 내고는, 의식에 흡사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게 해버렸다. 뇌의 어떤 해석부가 끄집어낸 쓰디쓴 잡탕의 이야기를, 그러나 뇌 자신은 전혀 의심할 수 없다. 많은 경우, 거짓말이란 거짓이라 자각하며 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뇌내에 있는 픽션의 레이어에 의해 전개되니까. 그러나, 뇌에게 있어 일차적인 인식-- 그러니까 본인이라는 '현실' 그 자체가 되면 레이어에 침입한, 자기자신에 대해서 하는 거짓은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자기자신은 이미 팡본 주택지의 아크로이드 저택에 침입했으나,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지못했다. 그러한 부정합에 직면한 뇌가, 멋대로 '스파이로써의 습성'이란 이야기를 내 머릿속에서 짜아놓았다. 사전에 자신의 상태를 파악한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뇌가 자기자신을 의심하는 건 매우 어려워진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자기자신의 뇌를 카페인으로 씻어내어, 상쾌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라 파보니 에스프레소 머신에 비틀비틀 다가가, 쓴 흙탕물을 한 입에 넘긴다. 그대로 힘없이 서재에 들어가, 소포의 봉인을 난폭하게 찢었다.

  한 편의 책. 그리고, 한 통의 편지.

  아아, 무슨일인가. 나는 이 소포를 알고 있다. 자신은 이 편지를 알고 있다. 더는 뇌에속지 않는다. 많은 해석이 홍수처럼 밀려들어도, 나는 전부 물리쳤다.  진실을 안 지금, 이 기시감은 그리 해석될 수 없다. 다만 문제는, 이 책은 무엇인가, 이 편지는 무엇이 적혀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내용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팡본을 방문해 처음으로, 과거의 기억이 시뮬레이션으로 내려왔듯이, 포장을 뜯어 책과 편지를 봄으로써 자신이 그것들을 안고 부쳤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듯. 보지 않으면, 알지않으면, 나는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할 수 없다.

  나는 인정하고, 먼저 책을 열었다.

  백지였다.

  어떤 페이지(장)도 새하얗다. 이래서는 책이라기보다는 일기군. 나는 어쨌든 책을 서랍안에 넣어놓고 슬슬 편지를 열어보았다.



  Dear Mr. Nothing(친애하는 허무님),



  자네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네.
  자네가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네.
  


  왜냐하면 느끼는 건 나의 역할이고
  나는 자네가 -- 과거에 필요로 했던 -- 의식이니까.



  자네는 내 빈 껍데기다-- 라고 말하면 실례이려나.
  자네는 이렇게 형용하자면, 마음바깥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이랄까.
  변명을 할 필욘 없지만, 이건 상대적인 문제일지도 모르네.
  빈 껍데기인 자네가 '나'의 본체이며, 나의 '의식'이란 건 거기에 들러붙은 기생충일지도 모르네.



   이 선물은, '의식'인 나로부터 자네에 대한 바람일세.
  자네도 나도, 일기따위 계집애스러운 물건을 매일 쓸 성질이 아닌 건 알고 있어.



  그러나 이건 전혀 다르네.



   이 백지 뭉치에, 자네의 이야기 -- 그건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 를 적어주기를 바라네. 신간이 허용할 때까지.
  자네는 눈치챘겠지. 내가 최후의 최후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그때가 올 때까지, 여기에 적어주기를 바라네.
  자네가 연기해온 움직임을. 흡사 내가 움직였듯이.
  거기서 느끼고, 놀라고, 무서워하고, 당황했듯이.
  실제로 자네는, 그리 반응했겠지. 그리 행동했겠지.
  설령 그내면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을지라도.



  나의 이야기로써, 여기에 적어주길 바라네. 그다지 시간은 없네만.



  자네가 나의 행동을 따를지 어떨지는 맡겨두겠네.
  가능하면서 그리 해주기 바라지만, 이 육체가 소멸할 가능성도 없지 않네.



  나는 소멸하길 바라고 있지만,  그럼 동시에 자네의 이야기가 소멸하니까, 양보해달라고는 할 순 없겠지.
  상사에게 보고를 하든, 이건 있을 수없지만-- 손을 먼저써서, 자살을 하든, 멋대로 하게. 물론, 나로써는 눈감아주는 게 제일일세.



PS : From concious with love(의식으로부터, 사랑을 담아)



  백지를 들이넣어 만든 물건을 손에 쥔다. 뒷장에는 일족의 문장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어, 호사스러운 제본이다. 표지에는 예상대로 한 문장이 새겨져있다. 현재형으로 쓰여진 가훈의 개변. 아니, 나의 의식의 후회라고도 할 만한 한 문장 -- 월드 워즈 낫 이너프(세계는 충분하지 않았다)라고.

  첫 페이지에는, 이미 문자가 적혀져 있었다--

 「나는 자기소각과 영원의 죽음까지 떨어져 간다

  블레이크 "밀턴"의 한 절.

  내가 계속해서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기자,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와있었다. 이 백지의 연속, 이 타뷸라 라사(순백의 무)를 보고 있으면, 알비온(새하얀 나라)이라는 우리의 대지를 형용하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떠오른다.

  "밀턴"에서 블레이크는 자신이 환시한 세계를 그리 이름붙였다. 블레이크는 거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눈떠라, 아아, 새로운 세계의 젊은이여라고.

  새로운 세계의 젊은이는 눈뜨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몇 겹이나 겹치어온 낡은 미늘이, 어떤 때 그 역할을 끝내고, 잃게 된다기보다는 애초부터 그러해야할 본질을 드러낸다.

  의식이여, 아아, 인간의 낡은 미늘이여.

  나는 얼음에 들어간 글라서와 스카치를 곁에 준비하고, 오크재의 책상에 느긋하게 기대었다. 펜을 잡고, 어깨의 힘을 빼고, 자신으로부터 보내져온 백지에 이렇게 적기 시작한다.


--이를 테면 나는 서적이다. 지금 이렇게 발생하고 있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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